▷ 이철진

支離叔與滑介叔 觀於冥伯之丘               
지리숙여골개숙 관어명백지구

滑介叔俄而柳生其左肘生者假借也 假之而生 
골개숙아이유생기좌주 생자가차야 가지이생

且吾與子觀化 而化及我 我又何惡焉         
차오여자관화 이화급아 아우하오언

지리숙과 골개숙이 冥伯의 언덕에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골개숙의 왼쪽 팔꿈치에 혹이 생겼다.

그는 마음속으로 놀라 이를 꺼리는 것 같았다. 지리숙이 물었다 “자넨 그 혹이 싫다고 생각하나?”

골개숙이 대답했다. “아닐세,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혹은 잠시 삶을 빌린 것이요, 죽음은 혹이 사라진 것이오. 그대와 나는 이 변화를 바라보았고 이러한 변화가 나에게 미친 것이요. 내가 어찌 혹(죽음)을 싫어하겠소.”

모든 自殺은 '사회적 他殺'이다. 자신이 선택하였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論語 衛靈公篇에는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이라고 말한다.
< 君子는 모든 책임을 自己에게서 구하고 小人은 모든 책임을 남에게서 구한다. >

瞑想家 Gurdjieff (1872-1949)는 自殺의 방법 중에는 굶어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自殺은 삶과 죽음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人類의 怨恨인 죽음을 觀照하고 초월해야 한다. 어찌 충동적이고 짧은 시간 內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겠는가.

죽어가는 자신(自身)을 바라보며 지켜보는 것이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이고 이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이 필요한 것이고 全生涯를 貫通하는 삶의 초월도 따르게 마련이다. 이로서 나의 眼中에 生死가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한 시대를 風靡했던 정치인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사람은 政治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고 나무는 땅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대저 정치를 한다는 것은 부들(蒲)이나 갈대(盧)와 같이 그 영향을 받는 데로 쓰러진다.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中庸 >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졌구나!
가련한 인생이여, 비바람 속에 왔다 가는구나!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宋翰弼 >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