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진

大馬之捶鉤者 年八十矣 而不失毫芒
於物无視也 是用之者 假不用者也
以長得其用 而況乎 无不用者乎 物孰不資焉

楚나라에 허리띠쇠(帶鉤)를 만드는 匠人이 있었다. 80살이 되어도 조그만 실수가 없었다.

大司馬가 물었다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나는 어릴 때부터 허리띠 만드는 일이 좋아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 않고 허리띠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허리띠를 만드는데 마음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쓰지 않는다는 마음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허리띠는 허리띠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혜와 편견을 말한다. 이를테면 눈앞의 콜라병을 들고 들여다보아도 뒷면은 보이지 않듯이 사물의 전체를 알 수 없다.

이것을 반쪽의 지혜라 하는데, 어릴 적 복선철로를 지나던 초등학교 5학년 학생 4명이 상행선은 보았는데 하행선 열차가 내려오는 것을 모르고 卽死한 일이 있었다.

어쩌면 사물과 진리의 일부분을 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편견의 무서움이다.

동창회를 참석해보면 옛날의 情이 일어나는 것은 좋지만 어린 시절의 幼稚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言語의 拙劣함, 같은 것은 과거의 세계관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馬祖는 大道를 성취하고 20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어렸을 적에 옆집에 살던 늙은 老婆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노파가 하는 말 “원 난 별놈이 왔는가 했네, 옆집에서 똥구르마 끌던 김씨 집 꼬맹이 놈이네.”<勸君莫還鄕 還鄕道不成 溪邊老婆子 喚我舊時名>

고향 老婆의 意識은 평행선을 가고 있고 馬祖는 螺旋形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평행선을 달리면(부분) 고향에 가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수직상승(전체)을 하면 고향 따위는 眼中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梁啓超가 말하는 오늘의 나로써 어제의 나를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不惜今日之我 難昨日之我>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같다고 보는 것이 편견이요,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다르다고 보는 것이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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