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희(공주시문화해설사 회장)

우리나라에서 ‘암행어사!’ 하면 곧 번쩍거리는 마패와 함께 어사 박문수를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은 제11대 중종 4년(1509)이나, 본격적으로 암행어사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제13대 명종 5년(1550)때로 보인다.

어사는 그 목적에 따라 순무어사, 안집어사, 균전어사, 시재어사, 감진어사, 안핵어사, 독운어사 등으로 분류하여 명칭과 같이 특정의 행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파견하였던 것이나 뒤에는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는 암행어사를 임명하여 행정을 감독하게 되는데, 암행어사로 임명이 되면 임금으로부터 봉서, 사목, 마패, 유척을 받는다.

봉서는 관할구역을 쓴 내용이며,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 마패는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이며, 유척은 검시(檢屍)를 할 때 쓰는 놋쇠의 자[尺]를 사용했는데, 조선왕조 400년간 수많은 암행어사가 임명되어 국왕의 성덕를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지방 수령 방백들의 탐학을 방지하였으며, 고종 29년(1892)에 전라도 암행어사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이 제도가 없어지게 된다.

조선시대 어사록이란 기록을 보면 임명받은 어사는 약 700여명이나 되었는데, 퇴계 이황도 있었고 실학사상의 태두 다산 정약용도 어사로 활약했다. 그 중 우리에게 친근한 이름인 어사 박문수(御使 朴文秀:1691~1756)는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어려웠던 시절 민심의 편에 서서 관리들을 벌하고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민중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다.

지모로써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통쾌하게 징악(懲惡)하는 어사 박문수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어사 박문수는 32세에 급제를 하였는데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동부(향교말)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천안이 출생지라고도 한다.

이토록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박문수의 어머니 또한 선조 때의 충신 백사 이항복의 고손녀로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이다. 박문수는 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이때 어머니는 겨우 30세 정도였는데, 홀로 된 몸으로 자식을 그토록 잘 키웠으니 후세에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훌륭한 인물이 공주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무척 고무가 된다. 1957년에 발간된 공주군지에 ‘공은 만년에 공주 교동에서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 교동의 52번지가 어사 박문수가 말년을 보낸 집터로 추정되는데, 교동초등학교 근처이다.

공주 교동에 살았던 어사 박문수의 집터를 복원해야 한다는 시민다수의 여론에 따라 백제로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이어주는 교통로로, 무령왕릉과 연계한 교동의 볼거리를 만드는 것을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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