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에서 공주 정착까지

1930년대 공주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백제유적을 연구, 흔히 ‘문화재도둑’으로 알려지게 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 <가루베지온의 백제연구>가 간행되었다.

금년이 가루베 지온 사망 40주기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저자인 윤용혁 교수(공주대)는 “가루베 지온이 범한 실수와 그가 남긴 학문적 공적을 이제는 좀 더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향후의 백제연구를 진전시키는 데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라는 관점을 밝히고 있다.  <가루베지온의 백제연구>를 요약하여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백제문화 연구(1)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일제하 공주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공주의 백제문화 탐구에 진력하며 특히 송산리 6호분을 처음 확인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 연구의 인력이 희소하였던 시기에, 그것도 중앙의 관학자가 아닌, 지역에 거주하며 지역사 연구자로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여 갔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독특한 점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거의 20년 세월을 공주와 그 인근에서 거주하며 백제의 왕도로서의 공주의 역사적 배경에 착안하여 백제 연구를 진행하였던, 근대 백제문화 연구 초기 전문 연구자의 1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 30대와 40대의 20년을 '백제'에서 지내며 교육자로서 혹은 역사 연구자로서 자기 나름의 삶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의 초기 연구사적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점이 적지 않다.

가루베 지온(이하 대체로 ‘가루베’로 칭함)은 자신의 연구 조사 결과를 전문 학술지인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에 여러 차례 게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백제미술(百濟美術)'과 '백제유적의 연구(百濟遺跡の硏究)'라는 연구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학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다. ‘연구’라는 명분으로 유적을 파괴하거나, 불법적으로 유물을 사취한 부정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가루베 에 대한 평가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이 유홍준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다.

▷ 6호분의 동벽 청룡도 실측도

이 무덤(송산리 6호분을 말함)을 가루베는 출토유물을 고스란히 자기가 챙기고 무덤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말끔히 치운 다음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가루베는 강경에 있던 이 훔친 유물을 트럭에 싣고 대구에 가서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렸던 오꾸라(小倉)와 함께 무슨 수를 썼는지 귀신같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가루베는 이렇게 도둑질, 약탈한 유물을 가지고 '백제유적의 연구'라는 저서를 펴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창작과비평사, 1997)

이에 의하면 가루베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도굴꾼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수집한 유물은 해방 후 교묘한 방법으로 일본에  반출되었다.

▷ 가루베가 주도하여 제작한 충남양토지(1935)책표지

▷ 가루베 지온의 유저 '백제유적의 연구(1971)속표지

 

 

 

 

 

 

 

 

 

 

 

또 다른 필자의 글에서 가루베 지온은 ‘문화재도둑’이라는 지칭을 받기도 하였다. 가루베에 대한 다소 극단적 평가는 일정 부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왔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가루베 지온은 1897년(明治 30) 야마가타현(山形縣) 니시무라산군(西村山郡) 다이고촌(醍?村)의 지온지(慈恩寺) 구가(舊家)에서 10남매 집안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본명은 가루베 케시로(輕部啓四郞), 절에서 태어날 만큼 특별한 불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하며, 집안이 어려워 절의 사미승으로 들어간 것이라 한다. 젊었을 때는 시즈오카현(靜岡縣) 다가타군(田方郡) 소재의 사원인 슈젠지(修禪寺)에서 한동안 수업(修業)을 쌓았다.  이때 출생한 고향집의 절 이름을 따 ‘지온(慈恩)'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그 후까지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년 이후 가루베는 각별히 건강에 신경을 써 다른 이로부터 ’건강의 전형‘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지만 어린 시절 그는 특별히 병치레를 많이 하며 성장한 병력을 가지고 있다.

4, 5세의 어린 시절에 감기가 폐렴으로 돌아 아예 살지 못한다는 판정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어린 시절 자신의 건강문제를 모친의 전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 가루베 지온의 근무지 공주고등보통학교 본관 건물

그런데 어느날 무슨 제사(마츠리)가 있었는지, 이웃집에서 떡을 보내왔다.  그것을 안 나는 “떡 먹고 싶어”하고 졸라댔다는 것이다. 쇠약의 극에 달한 유아에게 떡을 주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하고 싶은 것이나 해보라”고 생각해서 떡 한 쪽을 주어 보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조금씩 원기가 돌더니 어찌어찌 하여 목숨이 부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기로부터 소년기까지 나의 건강은 보통사람과 같지 않았다. 가족 사이에서는, 야위었다는 뜻의 ‘소’(瘦)라는 이름으로 통할 정도였다. 10살 때의 가을에 또 감기에 걸려, 폐결핵이 된 것 같았다.

당시는 아직 의학이 오늘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결핵이라면 가문에 오점을 남기다고 생각해서 늑막에 걸렸다고 하고 소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빈둥빈둥 지냈다.

당시 숙부가 두 사람이나 의사였기 때문에 그 수당을 받아 간신히 살아갔다. 그것이 언제 치유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 공주고보 향토관에서의 가루베 지온의 학생지도

그는 와세다 대학(문학부)에서 국어·한학과(國語·漢學科)를 전공하였으며, 이때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 선생의 지도를 받아 인류학과 한국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도다(戶田有二) 교수에 의하면 가루베는 와세다 입학 전에 불교대학인 고마자와 대학(駒澤大學)에 입학한 적이 있었는데 재학중 신병으로 인하여 학업이 중단되고 고향의 지온지(慈恩寺)의 자택에서 요양하였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죽음의 문턱에서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지온지(慈恩寺)의 구가(舊家)에 처박혀 지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그러나 와세다 이전 고마자와 대학 입학 사실이나 병으로 인한 학업중단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는 17세 이후의 성년이 된 이후로는 거의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7세 때, 호흡기 전문의로서 동경 아오야마(靑山)에서 개업하고 있던 숙부 댁에 붙어살았는데, 중학 3년에 편입시험을 보고 통학을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기쁨에 흥분을 느꼈음일까.  그 이후로 60대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의사에게 신세를 질 정도의 병에 걸린 적은 없다. 간혹 가벼운 감기를 앓은 적은 있지만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낫곤 하였다.

▷ 가르베 지온의 역사만들기

이에 의하면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동경으로 편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건강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생활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가루베 지온이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7년 1월, 그의 나이 만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의 교직 생활은 1925년 3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의 교편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의 평양행은 낙랑 및 고구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평양으로부터 2년 만에 공주로 직장을 옮긴 배경에 대하여 가루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처음 조선에 건너간 것은 대정(大正) 14년(1925)의 3월이었다. 지금은 북한의 서울이 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뒤의 숭실대학교)에서 고대사 강좌를 담당하면서 낙랑과 고구려 유적을 탐사하고 싶어서 조선에 건너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들 유적은 너무 유명하게 되어 있어서 젊은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남한 쪽에 오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충청남도 공주라는 곳의 중학교에 와서 근무하였으면 하는 것이었다.

전문학교의 교직을 포기하고 중학교로 옮기는 것은 좀 아쉬웠지만 그곳은 백제 당시의 구도(舊都)이기도하고 거기에 무언가 마음이 끌려 드디어 그곳으로 옮기기로 뜻을 정하였다.

가루베 지온이 한국에 건너온 것은 한국 고대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으나, 이미 일제의 관학자들에 의하여 연구가 진척되고 있었던 평양에서는 그가 끼어들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가 공주로 직장을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주는 부여와 함께 백제의 고도로 꼽히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고도’였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도굴된 송산리 고분군과 학봉리 분청사기 도요지를 제외하면 거의 발굴이라 할만한 사업이 시행된 적이 없었고, 총독부 등록문화재 현황도 매우 빈약한 실정이었다.

1927년 1월 영하 20도를 기록하는 엄동의 날씨에 그는 가족을 대동하고 열차편을 이용하여 조치원을 경유, 공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 2월 말에 송산리의 고분군을 발견하였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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