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교육과 문화재 관련 활동

공주고보에서 5년 간 담임을 맡았을 때 반의 생도였던 류제경(전 공주대 교수)에 의하면 교사 가루베는 국어 즉 일본어를 담당하였고, 학생들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면서도 한편으로  관용적인 면이 있어서 교육자로서 신망이 있었다고 한다. 공주고보 4회 졸업생 김영택은 가루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 2학년 때 부임해온 가루베 선생은 담당은 일본어였으나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3학년 때부터 백제역사를 읽어가며 역사를 답사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백제기와로 시작하더니 운동장 서쪽 자그마한 산에서 문헌에 있는 옛날 절터를 찾아내었고 급기야는 고마나루(熊津) 근처에서 왕릉까지 찾아내었다.

▲ 가루베 지온이 공산성 유적을 표시한 사진

다음은 공주군수를 지냈다는 제자 심춘택(沈春澤)의 회고이다.

공주고보를 다닌 사람이면 가루베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화제를 남긴 선생이었어요. 또 학생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습니다.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수단도 좋았죠.(변평섭 '실록 충남 반세기'1983)

1932년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공주고보는 5년제 10학급, 교사 21명(일인 19, 한국인 2인), 학생수 324명 규모였다. 또 교사 가루베는 “극장 출입 적발의 명수”였다는 회고담도 있어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엄격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1938년에 설치된 뺀드부도 담당하였다고 한다.

공주고보 재직 기간 중 가루베는 학생들을 통하여 충남 도내의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수집된 향토자료를 분류 정리하여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공주고보 교우회 명의로 1935년에 일문으로 간행된 '충남향토지'가 그것이다.

당시 교육계에서는 향토교육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고, 이같은 여건에서 가루베 지온은 역사, 유적, 구비전승, 민속 등 충남지역의 향토자료를 학생들로 하여금 수집케 하고 이를 자료집으로 간행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충남향토지』의 구성은 전설편, 향토사편, 토속자료편 등 3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군별로 학생들이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수록한 것이다.

가루베 자신은 향토사 편을, 그리고 다른 교사가 전설 및 토속자료 편을 각각 맡아 감수하였다. 이 책의 예언(例言)을 통하여 가루베는 향토연구와 향토자료의 중요성, 향토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 자기 향토의 연구에 의하여 보다 깊게 향토의 내용을 알고
- 가까운 향토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장래 다른 연구로 들어가는 동기를 만드려는 것
- 향토를 앎으로써 자부심을 갖게 하고 향토연구에 의하여 장래 개선해야할 일을 착안하려는 것
- 연구에 의하여 항상 세심한 주의를 사물에 기울이는 습관성을 기르고 한편 글을 만듦으로써 자기 의지 발표의 자유나 국어 학습을 꾀하려는 것

이 책은 300면에 가까운(294면)에 가까운 일종의 충남지역 향토자료집으로서, 서울의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정식 활판 인쇄로 출판한 것이다. 자료 수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생 26명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가루베 교사의 지도 아래 아마 수집된 자료의 기초적 정리를 분담하였던 듯하다.

▲ 가루베 지온의 공산성 유적지도

가루베 지온은 1930년 3월 교내에 향토관을 설치하였다. 그는 이 향토관의 주임교사가 되었고, 이후 “거교적으로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의 토기, 와당, 탁본, 사진, 기타 향토의 훈풍을 담은 여러 가지 유물의 수집에 힘썼다”고 한다.

가루베는 향토사 학습을 위하여 1930년 교내에 향토관의 설치를 주도하였으며, 이 자료실에는 공주에서 수습된 토기, 와당 등 고고학적 자료와 탁본, 사진 등 교육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당시 졸업앨범에 게재된 사진 속에서 향토실의 전시자료는 철화분청사기도 눈에 뜨이지만, 백제토기(병류, 장군, 기대, 삼족기 등), 기와류(암, 수막새)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탁본 자료는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일제하에서 강조되었던 향토사교육은 지역에 대한 총합교육(總合敎育)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지역의 전통문화, 혹은 역사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비중은 극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고보에서 향토교육이 지역의 역사고고학적 자료가 중심이 된 것은, 공주의 지역적 특수성과 함께 교사 가루베의 역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루베에 의하여 조성된 공주고보의 향토관의 소장 자료는 6.25 전쟁의 와중에 멸실되고 말았다.

1951년 1월 20일 교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공병대의 실화(失火)로 교사(校舍)가 소실되면서 향토관이 함께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향토관의 자료만이 아니라 개교 이후 보관중인 학교의 각종 문서와 자료가 함께 소실되었음은 물론이다.
 
과학관과 함께 전국적으로 자랑하던 향토실이 소실되었으니 향토실에는 향토자료를 비롯한 문화재의 자료가 한 교실에 가득히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값진 자료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가루베 지온의 향토사 교육활동은 학생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교사가 된 그의 제자들이 뒷날 학교 현장에서 향토실을 만들고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을 수업에 반영하였다는 것이며, 이후 지역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향토사 연구자의 배출이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었다고 한다.

가루베 지온의 활동중 앞으로 더욱 검토가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공주고보 교사 재임시 지역 문화재관련 단체에서의 역할이다. 공주박물관의 전신으로 1933년 공주사적현창회가 조직되어 지역에 흩어진 문화재의 보존과 전시 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공주사적현창회 이전에는 ‘공주군보존회’가 있었고, 이들은 공주지역 출토 유물의 보존과 관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박물관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일제하 공주군보존회, 혹은 공주사적현창회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루베는 얼마간의 유물을 여기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이 단체의 활동에 참여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귀국 후의 가루베는 공주에서의 박물관 설립에 자신이 직접 간여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다만 지금 내가 만족하는 바는 그 땅(공주를 말함: 필자)에서 내 손으로 남기고 온 왕릉의 유적이나 왕성지(王城址)의 유람도로, 특히 내 설계와 수집품으로 가능했던 백제박물관 등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들은 것이다.

이 글은 원래 1965년에 발표된 것으로, 공주박물관이 성립하는 데는 자신의 공헌이 깔려 있었다는 의미를 글에서 담고 있다. 공주박물관 설립의 전사(前史)에 대해서는 자세한 전말이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후 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이 발견되는 1970년대 초까지 약 30년 간 선화당(충청감영 동헌)을 전시실로 사용하였거니와, 원래 공주사적현창회가 선화당을 이축하여 전시실로 사용한 것은 1940년부터였다. 따라서 해방이후 공주박물관의 성립은 일제하 공주사적현창회의 수집 전시품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루베 지온은 이 ‘백제박물관’이 “내 설계와 수집품으로 가능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공주박물관 전신의 전시실이 만들어지는 데 자신의 일정한 기여가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루베가 당시 지역에 거주하는 거의 유일한 관련 ‘전문가’였다는 점에서 전시실의 구상과 개설에 그의 참여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전시실이 개관하는 1940년 경 가루베는 공주에서 대전으로 전근하여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공주사적현창회의 활동에 이후 적극 참여하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사실과 관련,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공주에서 ‘고적보존회’가 창립된 것은 1933년 경으로서, 도청 이전 이듬해인 1933년에 ‘백제박물관 건설 기성회’가 조직되어 그 활동이 가시화 되었다.

아마 이 시기의 박물관 건립 운동은 도청의 대전 이관 이외에도 왕릉급 백제유적인 송산리 6호분의 발견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백제박물관’의 개관은 충청감영의 동헌인 선화당을 앵산공원에 옮겨 1939년(1938년 착공)에 완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박물관 건립 이후 공주고적보존회의 역할을 ‘공주사적현창회’가 담당하였으며, 현재 공주박물관의 소장품 중에는 ‘가루베(輕部) 소장품’이라는 라벨이 있는 유물, 혹은 가루베의 필적으로 생각되는 ‘공주사적현창회’ 명의의 라벨이 확인되어 가루베 유물 중의 일부가 공주사적현창회(공주고적보존회)를 통하여 박물관에 유입된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량은 많지 않으며 유물의 중요도도 낮은 것이어서 가루베 소장 유물의 유입은 매우 작은 비중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관으로 활용된 선화당의 이전은 개관에 앞서 1938년 6월 24일 이루어졌는데, 이 사실은 공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선화당 이건시(移建時)의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1940년 박물관의 개관에 의하여 공주에서는 문화재 관련의 공식적 기관이 성립한 셈이다.

여기에는 가루베의 일정한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같은 공식기구의 성립은 가루베의 사적인 ‘문화재 활동’에 제한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루베는 이 무렵  대전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공주의 산야’를 누비며 이루어졌던 그의 ‘왕성한’ 활동도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은 환경이 된 것도 사실이다.(계속)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