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 공주지역 만큼 세세대대로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겸비한 곳도 드물다.

석장리의 선사유적부터 시작하여 백제유적은 공주를 대표하는 부분이고, 조선시대 여러 전적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불교유적과 더불어 천주교 성지도 참으로 많은데, 신풍면 봉갑리 수리치골 성지와 더불어 특별한 곳이 공산성 건너편 항쇄(죄수 목에 씌우던 칼)바위이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써, 매년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교리 책을 얻어 공부를 한 것이다.

이후 종교로서 들어오게 된 것은 1783년에, 이승훈이 동지사 사절단에 끼어 북경에 머무르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된다.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 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00년여의 세월동안 많은 사람이 순교하게 된다.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때 가장 신자들의 희생이 컸는데, 병오박해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그 파장이 컸다.

공주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이곳 감옥으로 끌려왔으며,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은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은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었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린다.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섰고,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천주교를 경계하게 하였던 것이다.

항쇄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을 쌓기 전보다 훨씬 넓었었는데, 홍수 때에는 천변이 순교자들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 한다. 이곳 항쇄바위 순교자 248위의 기록을 보면 100여년의 천주교 박해역사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다 보니 전국에서 참으로 많은 관광객과 순례객들이 몰려온다. 단지 종교적인 곳으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장소로써 항쇄바위도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하여 인근의 정지산 유적과 더불어 우리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여야 할 것이다.

공주지역의 첫 성당 건축은 국고개라 불리던 언덕 위에 1898년, 프랑스인 진 베드로 신부가 처음 교당을 세우고 공주에 교리전파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된다. 지금의 공주 중동성당의 전신인 셈인데,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지어진 지금의 건물은 1934년 착공하여1936년에 완공하였다.

갱경골로도 불리는 국고개에 세워진 성당은 그 당시 상당히 넓은 땅이었는데, 가난한 신자들에게 집지을 땅을 조금씩 떼어주다 보니 현재는 성당주변에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1982년에 공주 교동에 또 하나의 본당살림을 내었고, 현재의 아파트 밀집지역인 신월동성당의 모체가 된 중동성당은 1998년에 도 지정기념물이 된 것도 우리지역의 자랑거리이다.

성당 건물은 서양 중세기의 고딕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 매우 단아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전통적인 목조건물에서 현대 건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고, 이 아름다운 건축이 6·25 때에는 인민군들의 점거로 군마가 성당 안까지 난입한 적도 있으나, 무려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아름다운 성당이 지금까지 잘 보존된 것은 신자들의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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