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톨릭신자다. 내가 카돌릭 신자가 된 것은 순전히 장모님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장모님은 카톨릭 신자가 되는 ‘영세’를 받지 않으면 절대 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를 얻기 위해 영세를 받고 카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사실 믿음 없는 빈껍데기의 신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나에게 20여 년 동안 은근히 나도 모르게 성당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신앙생활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부님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부님들이 좋다. 이번 겨울 정확하게 작년 12월, 선종하신 이태석 신부의 짧은 생애를 다룬 휴먼다큐 ‘울지마 톤즈’를 영화관에서 보면서 나는 여러 번 눈물을 쏟았다.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느꼈겠지만 내가 맛본 감동은 훨씬 컸는데 이유인즉, 주인공이 내가 좋아하는 신부이면서 나와 같은 의사라는 묘한 연관성이 있어서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꿈속에서 이태석 신부님을 뵙곤 한다. 이것으로 짐작컨대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만하다.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인격적인 성숙은 둘째로 치더라도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성적이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하고 다섯 손가락 안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하며 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만 겨우 새끼의사가 되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이 존경스러운 것은 바로 여기서 부터인데. 너무도 힘들게 이룬 의사의 길이기에 대개는 보상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이 신부님은 보장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신부의 길을 선택했다.

말이 그렇지 신부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혹의 나이 40에 신부가 되어 먼 이국땅, 버림받은 땅, 세상에서 가장 못 사는 아프리카 남 수단으로 떠난 것이다.

이곳에서 신부님은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선종할 때까지 8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전쟁으로 피폐한 톤즈의 사람들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사셨다.

전쟁 속에서 학교를 짓고 35인조 브라스 음악밴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르쳤고 전기도 없는 마을에 태양열을 이용해 백신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이용해서 말라리아 등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생명을 밤낮없이 구하셨다.

그 와중에도 가장 버림받은 한센인 나병환자들을 찾아 따스하게 감싸주셨다.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녀 상처투성인 그들의 발을 일일이 종이에 그려 세상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들만의 신발을 만들어주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느껴 감사하는 그들을 통해 신부님은 오히려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한센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늘 겸손함 또한 잃지 않으신다.

한 번도 본적도 말 한마디 건넨 적도 없지만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나를 부끄럽고 슬프게 만들었다.

환자를 향한 이 신부님의 아낌없는 헌신에 나는 진정으로 눈물 흘렸으며, 의사의 길을 개인적인 욕심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신부님의 큰 뜻 앞에 나는 너무도 작았으며 아프리카 생활 내내 신부님이 느꼈을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한계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지난 1월 14일은 참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신부님은 떠났지만 그 분이 남긴 여운은 고스란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고 그것을 통해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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