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을 옛 부터 유람(遊覽)을 즐겨해서 『산수시(山水詩)』나 『강호가(江湖歌)』들의 『시가(詩歌)』를 많이 남겼다.

그리하여 산수를 유람하거나 머물러 살면서 그 흥취를 읊은 기록은 우리 문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산수 유람의 시들은 이미 고려 무신란 이전부터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으며, 그 전통은 조선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옛사람들은 서사의 문장을 『기(記)』라고 하며, 일의 유래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기념문으로 쓸 때에 사용되는 일이 많다.

유람이나 기행(紀行)을 시나 노래가 아닌 산문(散文)으로 적은 기록을 포괄적으로 『유기(遊記)』 또는 『유록(遊錄)』이라고 한다.  유기 가운데는 산뿐 아니라 강물·호수·절·서원 등 유람 대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산기 조선초기 본격적으로 생성

유기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의 부친인 이곡의 『동유기(東遊記)』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에 1243년 진정국사(眞靜國師)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가 발견되어 산문 형태의 유람기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시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기 중에 산을 대상으로 한 『유산기(遊山記)』는 조선조에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이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15-17세기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개화기 이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조 사대부들의 산행, 그것도 이름난 명산은 대개 모두 험난하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함에도 등정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세종 조부터 줄곧 진행되어 온 『지리지편찬』에서 그 원인을 들 수 있다.

세종연조에 나라의 국방과 조세의 기초질서 확립을 위해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제작하고, 성종 때 김종직 등에 의해 찬진(撰進.·임금에게 글을 지어 바치는 것)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그리고 나아가 중종 때 이행 등의 『속동국여지승람(續東國與地勝覽)』 등의 인문지리지 등장으로 국토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을 찬진한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이 조선조 국시인 유학, 즉 주자의 성리학 수용을 당면 과제로 삼은 것이다.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가 길재의 제자였는데, 길재가 높은 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고 하고 또 『등태산이 소천하(登泰山而 小天下)』라고하여 군자의 덕과 산수(山水)를 빗대어 말했다고 밝힌 후부터 사대부의 기개를 키우고자 산에 올라가는 전통적인 사고(思考)가 시작된다.
 
유산기 현재 약 6백여 편 전해져

또한 형산(衡山)에서 한 유(韓愈. 唐 중기의 대유학자이자 唐宋 팔대 문장가의 한 사람)가 보여주었던 세상사에 대한 초연한 태도가 김종직을 비롯한 주세붕·이황·조호익 등의 조선 전기 사대부들에게 전해지면서 『한산(韓山)의 도(道)에 처해 산수의 즐거움을 알게 되며, 이것이 공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요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주자의 남악(南岳) 등정의 예를 본보기로 삼아 놀면서 도를 실천하는 과정이 유산이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여 유산하는 행동을 선비들 수양 방법의 하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유산기는 조선조에 약 560편의 작품이 현재 전해진다. 그 중에서 17세기 전반까지 유산기는 약 60여 편이고, 그 이후가 500여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을 보면 이주의 『금골산록』(1502. 연산군8), 김안로의 『덕수유산기』, 임형수의 『유칠보산기』 (1542. 중종37), 주세붕의 『유청량산록』(1544. 중종39), 이황의 『유소백산록』(1549. 명종4), 이이의 『유청학산기』(1564. 선조2), 고경명의 『유서석록』(1574. 선조7), 이정구의 『유금강산기』(1603. 선조36), 유몽인의 『유두류산록』(1611. 광해군3), 남몽회의 『유속리산록』(1652. 효종3), 노경임의 『유금강기』(1619. 광해군4), 『유계룡산기』(1790. 정조14)등이 있다.  <계속>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