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교수, 6·25 전쟁 이후 57년만의 만남

내 생애 깜짝 놀랄 사건 ‘김교술’을 만나고

언제나 보고 싶었던
내 친구 김ㆍ교ㆍ술
 
결국 만났구나.
57년 만에...
 
고희를 앞 둔 우리
머리엔 흰서리 내렸으나
마음은 여전히 홍안 미소년
 
친구야!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늙어 가세나..
 

내 어린 시절 친구 김교술..

그 친구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인 1951년 1·4후퇴 당시 내 고향 강원도 강릉으로 피난을 왔었다. 우리는 그때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서울남산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왔다고 했다. 강릉성덕국민학교에서 3, 4, 5학년을 함께 다녔다. 4학년 때인 1952년 전쟁 중이지만 우리는 봄 소풍을 강릉 회산 솔밭으로 갔었다. 그리고 사진도 찍었었다.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나 엄기영이고, 그리고 네 번째가 친구 김교술이다. 우린 학교생활이나 방과 후 집에 오고 갈 때도 거의 붙어 다닌 짝꿍이었다.

5학년 때인 1953년 7월 휴전이 되었다. 내 친구 김교술은 5학년 2학기 말에 서울로 다시 전학을 가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전학 가는 친구를 환송하기위해 사진관에 가서 작별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이 나, 가운데가 담임선생님, 그리고 오른쪽이 친구 김교술이다.

내겐 57년 전의 이 친구를 기억할 수 있는 증거로 친구와 함께 찍은 이 두 장의 사진이 전부이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우린 헤어졌다. 우린 모두 이 친구가 예전 다니던 남산학교로 되돌아 간 줄로 알았다.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시절 늘 이친구도 서울 어디선가 살고 있겠지 하는 상상 속에서 만나고 싶어 했지만 연락이 닿지 못했다. 1972년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된 나는 제일 먼저 남산국민학교를 방문하여 1955년 졸업생 김교술을 찾았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그 이름은 없었다. 이제야 알았지만 그 친구는 그 당시 효창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었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방송을 통해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 친구나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도 가끔 저런 프로그램에 의뢰하면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 되면서 가정에서도 세계 여러 곳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저기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시간 나면 ‘김교술’을 치고 검색해 봤지만 검색결과는 언제나 ‘김교술’ 에 대한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라고 나왔다.

2011년이 되었다. 4월 중순.

여러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김교술’을 치고 검색을 했다. 드디어 한 군데서 그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경기고등학교 졸업 50주년 행사를 마련한 소식창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참말로 깜짝 놀랐다.동창회 사무실로 연락하여 이런저런 연유를 말하고 확인을 부탁했지만, 그의 국민학교 시절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는바 없어 확인이 어렵고, 또한 김교술은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라 더욱 금방 확인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5월초에 고등학교 졸업50주년 행사에 참여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교술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니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흥분된 감정을 누르고 4월 18일 옛날 국민학교 4학년 소풍 때 찍은 사진과 5학년 말 헤어질 때 사진, 이렇게 두 장의 사진파일과 함께 메일을 보냈다. 내가 찾는 김교술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맞으면 회신메일을 보내달라고...

From: 엄기영 [mailto:****@kongju.ac.kr]
Sent: Monday, April 18, 2011 7:55 PM
To:
********@comcast.net
Subject: 김교술 친구를 찾는 엄기영입니다.
김교술 씨
안녕하십니까?
나는 50여 년 전에 알고 있던 초등학교 때 친구 김교술이라는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강원도 강릉 성덕국민학교를 졸업한 엄기영입니다.
6.25 동란 때 강릉에 와서 성덕국민학교를 다니다 휴전되고 서울 남산국민학교로 전학간 김교술씨가 아닐까하는 기대로 이 메일을 보냅니다.
경기고등학교 동창회 명부에서 김교술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동창회 총무님과 연결이 되어 메일 주소를 알게 되어 연락을 드립니다..
첨부 파일의 사진을 보고 사진 속의 인물이 맞으면 답신을 주기 바랍니다.
나는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3년 전에 정년퇴임을 하고 지금 충남 공주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찾는 김교술과 동일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일 후 답신이 왔다.
내가 그 김교술이라고...

엄기영 교수
참으로 놀랍고 반가운 e-mail이었습니다.
성덕국민학교 시절이 내 일생에 아주 eventful 한 시기였지요. 또한 첨부한 사진을 보니 감개무량 합니다.
저는, 1968 년 유학차 미국에 와서, 학위 받고 여기 주저앉아 일하다가, 2005 년에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ies 에서 은퇴하고 현재 Santa Fe, NM 에 살고 있습니다. 고교졸업 50주년 행사참석차 내주에 제가 방한할 예정이니 그때 만나보길 바랍니다. 서울에 도착하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Kyo Sool from Santa Fe

이 짧은 메일로 보내온 소식이지만.....
이 얼마나 기다리던 친구의 소식인가..

한글 자판이 없어 메일을 작성하는데 아주 여러 시간이 걸렸다고..
앞으로는 영문으로 메일을 그냥 보내겠다고...
그래서 미국에선 영어로 한국에선 한글로 이렇게 메일을 주고받기로 했다.

4월 끝자락 그 친구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친구의 목소리인가..

우선 만날 수 있는 일정과 장소를 의논했다. 5월 3일 대전 유성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자기가 호텔 예약을 하려니 주민번호를 묻고 등등 절차가 복잡하다고 했다.

“친구야, 걱정 붙잡아 매어두게 내가 직접 가서 예약 해 놓을 테니...”
친구와 전화를 끊고 바로 유성으로 달려가 호텔 예약과 식당 예약까지 마쳤다. 5월 3일 오전에 친구의 전화가 왔다 서울을 출발하여 오전 중에 호텔에 도착할거라고, 도착하면 전화를 바로 하겠다고...

10시 30분 경 전화가 왔기에 반가운 목소리로 “벌써 도착 했는가?”라고 했더니....
그 친구 왈 “유성 가는 버스를 타려고 지하철로 이동 중에 속이 메스꺼우며 멀미가 나는 게 여행이 곤란한 상황이라 안정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출국하기전인 5월 12일에 서울에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쩌겠는가..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데..

그 친구의 집이 있는 산타페 공항에서 서울에 오려면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비행시간이 스물 네 시간 정도 걸린다니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테지...
57년을 기다린 친구인데 9일 정도야 못 기다리겠는가..
“그래 그 때 만나러 내가 서울로 갈게...”

▲ 2011. 5. 5. 공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김교술 친구와 57년만의 만남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 동틀 무렵 휴대폰 신호가 요란하게 울린다..
전화를 받으니 내 친구 김교술이다. “2-3일 안정했더니 건강에 문제가 없을 듯 해, 12일에 만나려니 그때까지는 너무 길어, 오늘 만나면 안 될까??”
“왜 안 되겠어 그래 오늘 바로 만나자.. 그럼 서울에서 경부선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를 타게, 내가 시간 맞춰 공주터미널에 나갈게..”

강남터미널에서 10시 출발 버스를 승차했다는 전화를 받고 우리부부는 11시부터 공주터미널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11시 30분이 넘어야 버스가 도착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5월 5일 어린이날 오전 11시 50분 공주버스터미널에서 헤어진 지 57년 만에 참으로 만나고 싶었던 친구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교술이 부부가 함께 와서 만났다. 그렇게도 궁금하기만 했던 일들을 9시간동안 만나 옛 추억을 더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 무릉촌사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우선 무릉동 우리 집으로 안내했다 어김없이 태극기도 게양했다. 기쁘고 반가운 날 우리 집은 태극기를 게양한다고 했더니 부부가 무척 좋아했다. 친구가 60년대까지 한국에 살면서 불렀던 노래로 기억나는 게 ‘하숙생’과 ‘추풍령’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김교술 부부를 위한 색소폰 연주를 선물했다.

나는 ‘하숙생’, ‘추풍령’, ‘보고 싶은 얼굴’, ‘섬머타임’을 연주하고 교술이는 보컬로 나섰다. 나의 아내는 ‘해변의 길손’, ‘장미 빛 인생’, ‘기러기아빠’를 연주했다. 그리고 다시 우리 부부는 색소폰으로 ‘고향의 봄을’ 듀엣으로 연주하고 교술이 부부는 함께 노래했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노래였을까..... 

우리 네 사람 모두들 눈가에 촉촉히 이슬이 맺히며 연주하고 노래 불렀다. 참으로 가슴이 멍멍해 왔다. 60년 전 1.4후퇴 때 피난생활에서 3년간 만났다가 57년 전 휴전과 더불어 헤어진 우리는 백발이 되고 고희를 맞이하는 나이에 잠시, 정말로 잠깐 만났다.

5월 5일에 아홉 시간동안 함께 있었고, 5월 6일 작별 전에 한 시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또 헤어졌다. 이 친구는 5월14일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약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을 한 무더기 남겨두고....


▲ 우리의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를 모두 만난 기분으로 가족사진 앞에서 기념촬영

▲ 소박한 가든파티.. 숯불 바베큐도 준비하고....

▲ 7년 전 간암 수술을 받고 성공적으로 투병생활을 하여 완쾌되었지만 음식은 조심해서 채식을 드는 편이라고 하기에 계룡산자락에서 제일 괜찮은 식당으로 안내 했다

<에필로그>
김교술은 아마도 그 오랫동안 그리웠던 한국의 정겨움을 많이 담아간 모양이다.

“친구야.. 건강해라.. 음식 조심하고... 그리고 내 친구 김교술의 부인이신 황여사님 내 친구 김교술을 잘 부탁합니다.“
이것이 헤어지는 순간 나의 마지막 멘트였다.

그렇게 헤어지고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친구 김교술 로부터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제목   Back home!                              받은 날짜   2011/05/17 04:58

보낸 사람    Kyo Kim <*******@comcast.net>

받는 사람    엄기영' <****@kongju.ac.kr>


Dear Ki-Young,
First of all, pardon me for not writing in Korean.  My Korean writing is rather awkward and it takes forever to type even a short letter.  We are back home safe and sound.  We even went to our gym to have workouts this morning!  My wife and I really appreciated  you and your wife’s hospitality.  You and your wife showed us what the Korean “jung”, means.  The Korean concept of “jung (情)” doesn’t exist in American psychology; there aren’t any appropriate English words to translate this complex concept.  Anyway, the short stay with your family provided me with a rare opportunity to reminisce our sweet, innocent, and carefree young days through a harsh war. It’s like a movie!
 
I attached a couple of pics.  I will send more in the future.
 
Love, Kyo &C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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