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문화재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예술의 전당에서 춤에 대한 좋은 기획공연이 있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함께 관람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서울 공연 나드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공연예술이 입에 풀칠하는 방편인 나로서는 공연관람은 직업적 의무이자 공부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공연 내용을 자세히 묻지도 않고 흔쾌히 길을 나선 것은 타인의 예술 속에서 치열함을 찾아내어 근래에 무기력해진 나의 예술적 태만에 채찍을 가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이 큰 탓 이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 5시 공연인데도 국립국악원 예악당 앞에는 이른 시각부터 많은 사람들로 분비고 있었다.

공연 안내 유인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승무>의 진유림, <북춤>의 하용부, <교방굿거리 춤>의 김경란, <한량무>의 임이조, <도살풀이춤>의 이정희, <채상소고춤>의 김은태 등 이 시대 장쾌한 춤의 노름마치들이 노는 신명나는 춤판이었다.

그냥 단순히 좋은 공연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유인물의 뒷면을 보는 순간 내가 그린 공연에 대한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오늘 공연의 주인공은 남원에서 올라오신 90세의 조갑녀 선생과 군산에서 오신 84세의 장금도 선생이었다.

두 분 다 지역에서 최고의 명무들이셨지만 시대적 상황과 가족사 때문에 춤을 접고 세월의 먼지 속에 덮여 있던 분들을 기획자 진옥섭씨가 오랜 세월 발품을 팔아 그 반열에 명무를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열거한 이 시대 춤의 노름마치들이 마지막 공연이 될 수 도 있는 두 분을 위하여 기꺼이 들러리를 서주는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기획자 진옥섭씨는 연출의 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강호재현이시여! 장차를 장담 못하는 춤이기에 부디 왕림하시어 시간의 증인이 되어주소서”

공연은 그야말로 잠시도 한눈을 팔수 없을 정도로 이 시대 최고의 명무들답게 정·중·동이 가득 차 있었고 음악 감독을 맡은 김청만 선생의 장구가락과 원장현 선생의 대금소리는 춤을 부르는 최고의 소리가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특히, 제자의 부측을 받으며 무대에 선 조갑녀 선생의 5분남직한 공연은 서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는 말을 실감케 하였으며, 장금도 선생의 민살풀이는 그야말로 손끝에서 춤이 뚝뚝 떨어지는 듯 했다.

또한 공연 중간에 객석에서 깜짝 출연한 소리꾼 장사익씨의 노래공연과 태평소 연주는 무명의 두 원로 춤꾼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예술적 내공과 외형적 실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여서 눈과 귀가 즐겁기는 하였지만 공연 전 지인과 나눈 짧은 대화가 귓전을 맴돌아 조금은 혼란스러운 관람이 되고 말았다. “오선생. 공주에는 저런 분들 같은 보물들 없어? 꼭 공연 쪽이 아니어도 공주 같은 곳이라면 계실텐데...”

그랬다. 지금까지 20여년 어렵게 예술 쪽 밥을 먹으면서도 전업 예술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에 붙어버린 “문화예술 도시 공주”라는 자기 최면 같은 것에 걸려서 일수도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공주시민들이 그렇게 부르며 밖에서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근래까지 작고하신 인당 박동진 선생을 비롯하여 명망 있는 예술계의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이름 없는 분들 중에 우리가 지키고 이어가야할 분야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지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공연 내내 조갑려 선생의 춤과 그동안 알고 지냈지만 스쳐지나간 무명에 어려웠던 공주 예술인들이 오버랩 되면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때로는 명망 있는 예술가만 바라보면서 한편으론 내 작업의 우선순위를 핑계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데 게을리 했던 것에 대하여 늦은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공연이었다.

늦은 밤 유구 한국예술공연체험마을 토방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폐교된 이곳에서 해내야 할 많은 일들이 이름만큼이나 길게 내 어깨를 누르고 있지만 그 보다 더 가슴 답답한 것은 그날 우연히 공연 뒤 로비에서 잠깐 뵈었던 전 공주민속극 박물관 관장이셨던 심우성선생의 초로의 모습과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흐린 눈빛이 초여름 바람에 문풍지 우는 소리와 더불어 자꾸만 술잔을 기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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