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山記는 일반적으로 記의 한 분야로 일반적으로‘遊記’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계룡산유산기’라고 하기 보다는 ‘계룡산유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일부 문헌에서는 記 대신 록(錄)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朱子의 『유형악록(遊衡岳錄)』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錄은 김종직을 위시한 성종대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시작되어 주세붕 및 영남선비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유산기는 散文이고,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詩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도 그만큼 소홀했다.

遊山記文學 活性化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일부 출판사가 『조선 중기의 유산기문학』을 비롯한 산수문학에 대한 출판과 고전번역연구원에서 『명산 답사기』를 번역 발간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조상들의 山에 대한 기개와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 자부심· 자연관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도 이러한 유산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계룡산에 대한 유산기가 없을까? 하고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몇 분이 남긴 유산기를 발견했다. 최근에는 이들 유산기를 포함하여 여러 편에 대한 유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럼 우리 선인들은 이런 유산기에다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대개는 작자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하는데 일련의 공통점도 드러낸다.

산을 오르는 과정의 고난과 보람에 관한 감회, 산행이 야기하는 도저한 풍류, 산수 경관에 대한 정밀한 묘사, 산이 보유한 명승· 고적· 설화에 대한 면밀한 報告, 산사에 머물며 산승들과 나눈 대화, 산을 누비는 도중에 문득 깨닫게 되는 도(道)에 관한 고백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유산기에 나타나는 선인들의 山水觀인데, 대략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선 산을 風流의 장소로 인식했으며, 다음으로 道의 비밀이 깃들인 공간으로 여겼으며, 마지막으로 인간의 장소로 인식했다.

풍류, 도(道)의 비밀, 인간의 장소

풍류의 장소로서 산은, 모든 유산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섬세한 자연 묘사에 나타난다. 대부분은 몹시 감흥에 찬 것인데, 입산 그 자체가 풍류의 동의어로 다가오는 내면 심리의 표출인 것이다. 도(道)의 비밀이 깃들인 공간으로서의 산은, 산행을 통해 도심(道心)을 기를 수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산은 일종의 정신적 교사였으며 선인들은 등산을 통해 심신을 수양했다. 이는 유산기 작자들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생의 근본 도리로 아는 성리학자들이라는 사실과 긴밀한 관련을 가진다.

인간의 장소로 여겼다는 의미는, 사람과 만물의 시원이 되는 근원적 공간으로서 산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한편, 성리학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은 인간사의 영욕이 얼룩진 삶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유산기를 통해 산에 사는 백성들의 시련에 찬 삶을 보고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의 유산기는 그 당시 시대상을 알게 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조선 사대부들이 누린 산행 문화를 통해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진상을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왜 계룡산 유기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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