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1981년 大田市民會館에서 法頂은 이러한 法語를 하였다. 살 때는 전심전력을 다해 살고 죽을 때도 또한 모든 것을 던져 죽어야한다.<生也全現機 死也全沒機>

瞑想家들이 흔히 말하는 話頭중에 Here and now<지금 여기에 살라 (존재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과거는 단지 기억일 뿐이며, 미래 또한 우리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와 과거는 실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일 뿐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가 실재가 아니라면 당연히 지금 여기도 실재가 아니다. 지금 여기라는 개념이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이 없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들은 지금 여기에 머물려고 노력한다.

지금 여기라는 말은 과거와 미래로 기웃거리는 것을 잡기위한 고삐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말이 없다면 지금 여기라는 말이 왜 필요하겠는가?

莊子는 이것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으로 喝破한다. 삐뚤어지고 굽은 고목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못생기고 구부러진 나무를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長壽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새벽이 되면 잘 우는 닭과 울지 않는 닭 중에 잘 울지 못하는 닭을 친구의 酒案床(술안주)으로 요리하라고 말한다.

제자가 묻는다. 도대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가운데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합니까?
莊子는 말한다. 깨달은 사람은 어느 곳에도 處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 머물러도 허물이 되기 때문이다.<周將處夫材與不材之閒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與時俱化 而无肯專爲>

나는 말한다.

전력투구하여 산다고 하는 것은 삶에 발자욱과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만 못하고 모든 것을 던져 죽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니 온 듯이 살다 가는 것만 못하다.

나는 세상과 더불어 변화하되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設使 삶과 죽음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하면 與時俱化 而无肯專爲의 삶을 전력투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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