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생에는 자기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

자기의 노력만으로 혹은 자기의 지혜만으로 자기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것도 꼭 그렇다고 한다.

사람이 고심을 거듭하며 모양을 만들어 가지만 정작 그릇이 불에서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나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임란 포로, 도공 장일륙

지난 6월 무령왕 축제 답사에서는 일부러 아리타를 방문하여 이공 삼평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다. 마침 도예촌의 이재황 선생이 동행한 덕에 여러 가지 자기 공부를 아기자기하게 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하여 나가사키 국제대학 이교수가 연결되고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리타정의 담당 공무원이 직접 나와서 현지에서 시간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무령왕 축제 답사 때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아리타를 들르지만 아리타는 인적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한 징크스를 깨고 조금은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한 것이 지난 제10회 무령왕 답사였다.

오키나와에 자기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 임진왜란 이후이다. 그런데 그 역사는 조선의 한 도공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의 이삼평에 해당하는 인물은 장일륙(張一六)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왜장 시마즈(島津)에 의하여 사츠마(큐슈 남단, 지금의 가고시마)로 잡혀갔다가 유구왕국 상풍왕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에 초빙된다. 시마즈라고 하면 가고시마의 영주로서, 도공 심수관을 잡아간 인물이다.

임란 이후 시마즈는 축적된 군사력을 동원, 1609년 유구왕조를 점령하여 복속시켰다. 유구의 상풍왕자는 이때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1616년에 고국으로 되돌려져 왕위를 이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신기술 도자기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그는 귀국에 즈음하여 시마즈에게 조선 도공의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장헌공(張獻功)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기록된 일륙이 유구에 파견될 때 그는 일관, 삼관 등의 인물과 동행하였다.

일관, 삼관 두 사람은 곧 사츠마로 돌아갔으나 일륙만은 돌아가지 않고 마우시(眞牛)라는 이름의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오키나와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 ‘나카치 레이신(仲地麗伸)’, 그것이 자기를 만들다 자기를 만난 오키나와에서의 일륙의 새 이름이다.

그의 자손들은 이름에 ‘려(麗)’자를 대대로 붙였는데 그것은 아마 조선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일부러 넣은 글자일 것이다. 장일륙이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와쿠다가마(湧田窯)의 초기 도자는 퍽 소박하기는 하지만 철화분청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 받은 오키나와의 도자기에서는 그 후 중국, 일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 분청의 맥을 느낄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그의 작업장이 지금은 도심으로 변하여 오키나와의 현청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만들다 자기를 만난

처음 조선 도공들은 유구에서의 몇 년 기술지도 후에 사츠마로 돌아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일륙은 궁벽하고 불편한 오키나와 생활을 감수하면서 섬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불편하지만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바람을 종내 저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조선의 어느 고을에서 뜻하지 않은 전란을 맞고 왜장에게 포로가 되어 사츠마로 옮겨지더니 다시 생전 한번 들어보지도 못하였을 유구왕국으로 보내진 그는 결국 오키나와의 해풍 속에 뼈를 묻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소설같이 파란만장한 운명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삶에도 그런 예기하지 못했던 요소들이 조금씩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공부 가운데 가장 좋은 공부가 ‘자기공부’라고 나는 아리타에서 축제에 동행한 이들에게 농담 삼아 거들었다. 그 말대로 오키나와에서 바야흐로 나는 자기 공부 중에 있다. 그 ‘자기 공부’는 도자기 공부이기도 하고 내 공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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