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당시 문화관광부는 그해를 지역문화의 해로 지정하여 전국의 각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선별하여 대전 유성에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그 곳에서 문화관광부는 2박 3일 동안 백가쟁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지역문화의 문제점과 정부 문화정책에 대한 개선방향에 대하여 주제를 정하고 모둠을 만들어서 격의 없이 난상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얻어진 결과물들을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여 그 후 백화제방이라는 정책집을 만들어 문화정책에 반영한 바 있다.

원래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이라는 말의 의미는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편다는 의미로 누구든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 중국 공산당의 정치 구호로서 1956년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쓴 말이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이 정책이 부르조아적 자유주의라고 규탄당하면서 비판당하기도 하였지만 1976년 4인방이 체포 실각된 후 문예, 학술분야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한때 장려되었고 1978년 3월 채택된 중국헌법에서는 국가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실천함으로서 예술발전과 과학발전을 촉진하고 사회주의 문화번영을 촉진한다고 명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그때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였다.

사실 이 정책 본래의 취지는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비판이 감행되어 스탈린 신화가 일거에 붕괴되자 큰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고 누구든 간에 자발적인 참가를 통하여 비판과 자기비판을 시도하여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해 나가자는데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회전반의 모든 문제가 불만으로 터져 나오고 특히 마오쩌둥 권력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던 것이었다.

이에 놀란 마오쩌둥은 격노하여 전면 공격으로 작전을 선회한 후 이제는 그 비판한 자들을 오히려 우파로 몰아세우면서 반역자로 취급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는 비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치의 혀를 놀려 피해를 보거나 때로는 승승장구하는 군상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결과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그들에게도 다 핑계 내지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언젠가 TV광고에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카피문구를 보고 지금 이시대의 사회구조에서 저런 식의 발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극화 된 여론이 아닌 다수가 주도하는 여론 속에서 당당히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저런 카피가 신선해 보일까 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얼마 전 이임한 김병현 前 공주지청장께서 금강뉴스와 인터뷰 내용 중에 “공주에는 주인이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읽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 공주의 주인인 시민들이 많은 걱정과 좋은 생각은 있어도 다른 동네 이야기 하듯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한마디로 결론을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 지금보다 좀 더 사회적 현상에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신 말씀일 것으로 해석을 해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듣거나 말 하였으면서도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먼저 맞는다’는 속담을 본능적으로 가슴에 감추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볼 때 그 당시는 부딪힘 없이 편하게 지나갔을지는 몰라도 장기적 안목으로 우리 자손들과 미래사회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하여 체감해봤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여 어렵다면 아직은 토론문화가 일천하긴 하지만 다수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건전한 토론문화가 빨리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어 공주 발전을 위한 아름다운 토론문화의 꽃을 함께 피어 나아갈 때 공주의 미래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지금은 마오쩌둥 식의 백가쟁명시대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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