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정말 오키나와까지 갔을까.

지난 6월 충남향토사대회의 홍길동세미나에서는 이해준 교수와 서정석 교수가 공주의 홍길동 자료에 대하여 문헌과 유적을 중심으로 각각 발표하였다.

그 때 또 한 사람의 발표자였던 설성경 교수는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갔다’는 한 줄 결론을 위하여 두 권의 논문집을 출판하였던 이이다.

그의 가설은 오래 전 티비의 다큐로도 방영된 적이 있다.

오키나와의 홍길동, 홍가와라

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실존인물 홍길동은 1500년 의금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홍길동으로 지목된 ‘오야케 아카하치 홍가와라’는 1500년에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기하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의 연대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설 교수는 ‘가짜 홍길동’을 등장 시킨다. 즉 1500년 처형된 홍길동은 가짜 홍길동이며, 진짜 홍길동은 그 이전 이미 오키나와로 거점을 옮겼다는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던 홍길동이니까, 조선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오키나와까지, ‘남에 번쩍’ 못할 일은 없다. 

소설 홍길동전에서 길동은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로 떠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 ‘율도국(栗島國)’과 비슷한 이름의 ‘율국도(栗國島)’라는 섬이 오키나와 서북쪽에 있다. 오키나와의 ‘율국도’도 원래 밤 재배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교수가 말하는 오키나와의 홍길동은 이  율국도가 아니고, 야에야마(八重山) 제도를 무대로 하여 활동한 인물이다. 기록상으로는 ‘오야케 아카하치 홍가와라’인데, 슈리에 있는 중앙정부의 과중한 공물 요구를 거부하고 주민들을 결집하여 봉기한 것이다. 그는 1500년 2월, 중앙 슈리정부에서 파견한 3천 군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기록에는 ‘오야케 하카하치 홍가와라’가 한 사람이 아니고 ‘2인’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헌의 기록 혹은 구전은 두 사람 중 ‘오야케 아카하치’에만 한정되어 있고, ‘홍가와라’에 대해서는 이름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오야케 아카하치 홍가와라’가 원래부터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거세다. ‘아카하치’는 원래 하데르마지마(波照間島)라는 다른 섬 출신인데 야에야마(八重山) 제도의 거점인 이시카키시지마(石垣島)에서 세력을 확보하여 봉기한 것이다.

홍가와라의 정체는 불명이어서, 아카하치와의 동일인물 설에서부터, 어떤 이는 그가 아카하치의 아들, 혹은 동생이라고 풀이한다.

나도 홍길동처럼

아카하치 홍가와라의 활동지 이시카키 섬은 말이 오키나와현이지 오히려 타이완에 가깝다. 오키나와와는 한 마디로 전혀 ‘딴나라’인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항공편으로 거의 1시간, 인천에서 후쿠오카 가는 시간이 걸리고, 원래는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결국 아카하치의 난은 오키나와 본섬 슈리정부의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하여 지역의 독자성을 내세워 저항한 정치적 투쟁이었던 셈이다.

이시가키를 점령한 슈리정부는 그 후 100년 뒤인 1609년에는 거꾸로 사츠마의 침공을 받아 일본에 복속하는 신세가 된다. 이때 오키나와에는 목숨 걸고 사츠마에 저항하는 아카하치 같은 인물은 없었다.

아카하치 세력이 중앙군에 저항했던 이시카키 섬에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비석이 서있고 오하마(大浜) 해변의 공원에는 포효하는 아카하치의 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은 아키하치 5백년을 기념하여 서기 2000년에 건립한 것인데, 이 제막식에는 홍길동의 출생지라고 말하는 장성군의 군수도 참석하였다. 아카하치 홍가와라, 그를 ‘오키나와의 홍길동’으로 생각하기로 이시가키 호텔에서 나는 마음 먹었다.

7월에 시작한 오키나와 통신은 이제 7회로 끝을 맺는다. 홍길동 세미나 이후 오키나와에 온지 석 달이 지나고, 귀국의 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홍길동은 율도국으로 갔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이제 홍길동처럼 율도국으로 간다. 백제문화제가 시작되는 밤(栗)의 나라, 율국(栗國)의 공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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