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순 할머니 “공부 안 할거면 나가라” 호통도

공주고등학교 뒤편 구불구불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일반 가정집에 고소한 냄새가 난다. 보리밥 한가지로 손님을 맞는 ‘할머니 보리밥’.

방금 따온 듯한 야채로 버무려진 나물 등을 얹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보리밥에 시래기 된장국이 더 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상차림이다.

▲ "그때는 밥을 이만큼씩 퍼 줬어"라고 웃으며 하숙치던 때를 회상하는 박한순 사장

이곳이 식당으로 개업한 것은 2003년.

공주고등학교에 기숙사가 생기면서 하나둘 씩 하숙생들이 기숙사로 빠져나가고 기숙사가 하나 더 신축된 이후 하숙생들이 줄어드는 조짐을 보일 무렵이었다. 16년을 해온 하숙업에 일대의 위기라면 위기일 수 있는 상황의 타계책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보리밥을 하면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될 일이 아니라 잘 할 일’을 그때 그녀는 생각해 낸 것이다. 동네 이웃들도 맞장구를 쳐주기에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하숙생들이 식사를 하는 마루에 밥상 몇 개 더 보태서 보리밥을 팔기 시작했다.

요즘 흔한 말로 대박이었다고 한다.

“시청 공무원들도 많이 오고 잘된다고 소문나니까 근처에 식당이 계속 생기더라구요”라고 당시를 회상하는 박한순 씨의 옆에서 남편 배성길 씨도 더 신이 나서 거든다.

“여기서부터 봉황동까지 식당이 한 15~20개 생겼나? 그 중에 보리밥집만 6개나 됐어요”

그러다 보니 일하는 사람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남의 맘이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이내 혼자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심만 하면서도 하루 70그릇 이상을 팔던 것이 경쟁도 늘고 취향도 바뀌어 지금은 20~30그릇 정도라고 한다. 식당과 겸업을 하던 하숙은 2009년 2월로 이미 마감한 상태.

식당을 한 뒤로도 이 동네의 하숙생 수는 자꾸 줄어들었다. 길면 고등학교 3년 주기로 학생들이 순환되는데 마침 2009년 그 해에 하숙하던 학생 7명과 함께 생활하던 손자까지 8명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박한순 씨는 그 무렵 내과수술을 하게 되어 그 참에 하숙을 접었다고 한다.

“아빠는 벌어서 애들 공부시켰고 하숙으로는 우리 식구가 먹고 살았어요”

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간식이라도 챙겨주랴 새벽 2시에나 잠이 들었고 아침 일찍 공부하러 가기 전에 밥해 먹이고 도시락 싸느라 5시에 일어나야했다는 하숙집 주인 박한순 씨.

그가 하숙을 시작한 건 1986년, 남편의 고향인 공주시 중학동 189번지 지금 이곳에 터를 잡고서 부터다.
결혼기념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박한순 씨.

1962년 9월 22일. 서산군 해미읍이 고향인 박한순 씨는 어머니가 다니던 절의 보살님 소개로 정안면 운궁리에 살던 남편 배상길 씨와 20세의 나이로 혼인을 해 3형제를 두었다.

그 뒤 1976년 남편 배 씨는 대림산업에 취직해 건설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울산으로 이사를 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건설현장을 누볐다고 한다.

외국생활에 지치고 장손으로서 고향을 자주 왕래해야했던 배씨는 1986년 아예 공주로 귀향해 건설업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아직도 은근히 눈총 받는 일이 생겼다. 공주고등학교 소유의 땅에 지은 집을 당시 돈 1,150만원에 건물 값만 치르고 사버린 것이다.

▲ 박한순 사장과 남편 배상길씨가 이곳에서 30년이 넘게 하국집과 보리밥집을 운영했다며 집안 곳곳을 안내해 주고 있다.

부인 박씨는 팔리지도 않고 (집주인은-공주고) 나가라지도 않는 20년 넘은 이집에서 ‘살자니 불편하고, 수리를 하자니 내 집이 아니어서’ 속이 많이 상한다고...

그런저런 사정과 사연을 안고 박한순 씨의 공주생활은 시작되었지만 건설업의 특성상 남편은 장기 출장이 잦은데다 조금이라도 집안 사정에 보탤 요량으로 동네에서 흔히들 하던 하숙(당시 인근에만 15집 내외)을 시작했다.

공주고등학교와 영명고등학교 학생이 대부분이었지만 출신지는 가깝게는 유구읍에서부터 서산, 서천, 안면도까지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새벽 2시 취침 새벽 5시 기상의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

첫 해에 하숙을 한 학생이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박씨의 생일을 알고 꽃을 사왔기 때문. 40대 중반에 들어선 하숙집 주인인 그를 학생들도 그녀도 자칭타칭으로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느 날 할머니가 학생들에게 “너희는 내 손자들이다. 고등학교 시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니 지금 잘 해야 출세하고 호강한다. 공부 안 할 거면 하숙 때려 쳐도 좋으니 나가라”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꼭 생일 꽃에 대한 할머니 식의 역설적인 사랑의 호통, 그래서 고마움의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머니’ 손은 크고 배려도 깊었던 것 같다.

“음식은 먹고 남을 만큼 해줬어요. 저녁에는 뼈다귀탕이든 곰탕이든 기름기 있는 걸로 해줬고, 한 달에 두 번은 통닭시켜 먹이고...”

고3생들의 시험 100일 전에는 맥주나 샴페인으로 ‘백일주’를 챙기고 시험 전 날에는 찹쌀밥과 찹쌀모찌(떡)를 꼭 먹여줬다고 하니 ‘할머니’의 자상함과 ‘이모’의 센스를 겸비했다고 할까?

하숙집 ‘할머니’ 박한순 씨는 하숙을 그만둔 이후로는 계란후라이를 안 부친다고 한다. 매일 5시에 일어나 학생들의 도시락 7~8개를 싸며 부친 계란에 질렸다고.

“그래도 그때 학생들은 편했어. 계란과 김치에다 김이면 됐거든, 소세지가 들어가면 난리가 났고...”

그나마 처음 하숙을 시작할 때도 여학생은 받지 않기로 정했다고 한다. 여학생의 까탈스럼움이 까탈지겠기에. 하지만 박씨도 못지않게 자신에게 까탈스럽게 학생들을 챙겼음직하다.

“그때는 학생들이 다들 흰 양말을 신었는데 그걸 빨아다가 풀까지 먹여서 말렸지. 그런데 빨래를 훔쳐가는 일도 많았어. 그러니 어떡해? 빨래줄 한가득히 틈 없이 양말로 채우는 거야. 하나라도 훔쳐 가면 훔쳐간 티가 나게.”

그렇게 자신의 성격대로 자식과 손자를 키우던 대로 하숙생들을 키우다시피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1번, 점심 먹으러 와서 2번, 오후에 운동하고 와서 3번, 밤에 자기 전에 4번씩이나 T셔츠를 벗어놓는 학생들은 감당키가 쉽지 않았다고. 그런데 그 학생이 친구까지 데려와 친구 옷까지 벗어 놓고 가기도 했다니, 정말 ‘헐~’이라는 표현 밖에...

▲ 할매보리밥집의 밥상

 잠간 지나가는 얘기 또 하나.

1986년의 하숙비는 6만 5,0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한 달 하숙비가 쌀 한가마니 값이었다는데 그 후 매번 하숙비는 쌀 한가마니 가격에 비례해 인상 됐고, 박 씨가 하숙을 그만둔 2009년에는 30만원. 당시 원룸 가격과 기숙사비가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00년을 지나면서 쌀 한가마니의 기준도 기숙사비 기준으로 바뀌었고, 그건 아마 ‘기름값’이 기숙사비의 비교기준이 된 것 같다는 것이 박 씨의 분석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학생들의 속옷까지 다 빨았다고 한다. 손빨래에서 세탁기, 대용량세탁기로 계속 투자를 늘려야했지만.

기억나는 학생들도 많지만, 기억나는 부모도 있다고.

대천에 사는 한 어머니는 하숙집에 올 때 마다 ‘봉투’를 놓고 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할머니 용돈’이라고 운을 떼다가 이내 ‘아이들 간식해 주세요’라며 얼버무리던 어머니. 물론 그날 애들은 배 터졌을 거다. 아마.

미운학생도 있었다. 유독 여학생을 ‘일찍 알았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만 두지 않고 하숙집에서 쫓아내 버렸는데, 한참 지나 성인이 된 그 학생을 시내에서 만났는데, 여전이 장시간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그를 보고 또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나마 얼마 전 들은 소식으로는 무슨 자격증을 따서 직장을 옮겼다고...

‘할머니’ 박한순 씨는 세월을 거스르지도 세월에 휩쓸리지도 않으며 오늘도 오는 손님 반가워 반찬 한 접시 나물 한 점 더 챙기고, 이제는 ‘할아버지’인 배상길 씨도 그런 아내와 보리밥상을 나르며 소소하지만 시름없는 나날을 살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의 고향 정안면 운궁리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배씨의 장남은 ‘할매 보리밥’의 신선한 식재료를 다 책임진다.

“둘째는 신관동 살면서 회사 대니고, 셋째는 서울서 또 회사 대닌다”는 두 부부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쏠쏠한 공주의 어제와 오늘을 지니고서 낮은 상다리에 푸근한 흙 내음과 손맛의 정겨움을 올려준다.

(할매보리밥집 : 공주시 중학동  ☏ 041-855-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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