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백제유적지 중에서 유독 세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이 있다.

취리산!

백제가 끝난 뒤, 백제와 신라가 당의 권유로 하늘에 화친을 맹세한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 취리산은 지금의 공주생명과학고(농고) 뒷산의 지명으로 산의 모양이 키처럼 생겼기 때문에 치미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665년 공주 취리산에서, 백제왕자 부여 융과 신라문무왕, 당 장수 유인원이 이곳에서 백마를 잡아 그 피로 맹서를 한 제단터이다.

이 일의 배경을 보면 나당연합군은 동상이몽으로 연합하여 일단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둘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 양국사이의 갈등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당은 신라를 견제하면서 한편으로는 한반도 지배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 유민의 치열한 부흥 운동을 무마시키고, 백제 고토에 대한 부여융의 통치권을 일시 보장해 주는듯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백제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려던 신라를 견제하고자 화친의 맹세를 시키게 되는데, 그 약속의 징표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바로 취리산의 회맹이었다.

당시의 회맹문은 당의 장수 유인원이 지었다. 그 내용은 웅진도독 부여 융으로 하여금 백제 선왕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강토를 보전하게 한다는 것, 제라 양국은 서로 화친하여 환란을 구하고 형제처럼 도우며 지낼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회맹’의 의식은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부터였다 한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힘을 잃은 뒤부터인데, 강대한 제후국 군주는 이름뿐인 주나라 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호령하였다.

‘회(會)’는 일정한 의제와 장소, 시간을 정해 다른 제후국 군주들이 모이는 것을 이른다. ‘맹(盟)’은 회맹에 참여한 제후들이 차례로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를 ‘삽혈(揷血)’이라 한다.

이 취리산의 제단터는 <동국여지승람>에도 그 사적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고, 출토 유물 중 인화문 토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던 무렵에 사용한 것으로 보아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수많은 흔적 중, 이렇게 역사적인 곳을 무관심으로 지나쳐버리는 것은 백제후손으로써 부끄러운 일이다.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더욱 발전시키고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진데 우리지역민은 그런 것에 소홀한 것이 아닐까.

취리산은 기다린다. 천 삼백여 년을.

그 제단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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