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수라는 명칭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해당 분야 전문가로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철밥통’이라는 말에서 보듯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후자의 아집이나 고집불통 이미지는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

대략 198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대학도 많지 않았고, 당연히 교수라는 직업도 희소성이 있었다. 그러나 살인적 대입 경쟁을 해소한다는 군사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대학 설립이 급증하면서 교수 숫자도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개중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수들도 양산되었고, 희소성이 사라지게 되자 자연히 교수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권위주의적 정권은 자신들의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희석하기 위해 대학 총장이나 교수들을 총리나 장관, 국회의원으로 차출함으로써 교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강단에서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던 교수들의 청렴성과 신선한 이미지는 상당 부분 비민주적 정권의 치부를 가리는 데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정치적 욕망을 가진 교수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우리 사회에 ‘폴리페서’라는 부정적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교수의 역할과 기능으로 흔히 교육, 연구, 봉사의 셋을 꼽는다. 교수(敎授)라는 문자에서 보듯 교수의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은 교육이다. 미래의 인재에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서 인격과 품성을 갖춘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하는 게 교수의 기본적 사명이다.

그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고금의 선학들이 축적해 놓은 지식을 섭렵하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는지 비판적 판단을 하며, 미래에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게 바로 제대로 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와 교육은 상보적인 관계라고 보아야 한다. 또 봉사라는 개념은 전문가로서 습득하고 창출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상아탑 안에 사장하지 말고 사회와 소통하면서 공동체 발전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일부 교수들은 이 봉사의 개념을 오해하여 현실 정치나 사회 변혁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계기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총선이나 대선 등 주요 정치적 계기마다 본인이 직접 교수의 역할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참여하는가 하면, 유력한 후보의 캠프에 정책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대거 합류하는 경우도 많다. 교수의 기본적 직분에 비추어 보면 분명 일탈이고 비정상이다.

심지어는 교수직을 유지한 채 정계나 관계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다수 본분에 충실하고 있는 교수들에게까지 덤터기를 씌우는 정치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은 교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여 전체 교수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교수의 연구에 대한 정책 또한 교수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넘어 교수직에 대한 회의까지 불러오게 하고 있다. 어느 새 우리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린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정책이 교수의 연구 영역까지 점령하여 연구의 내용이나 질을 따지지 않고 계량적 수치로 연구 능력과 교수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교과부 행정 직원들의 아이디어 수준으로 제기된 연구 정책, 예컨대 연봉제, 성과급, 선별 지원 등이 대학 사회에 강압적으로 적용되다 보니, 교수들은 본연의 연구가 아니라 단기간의 숫자 채우기 논문 작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일선 교수들의 자조적인 말에서 보듯 이건 연구가 아니라 논문 작성 기계에 의한 논문 제조에 가깝다.

그뿐인가. 요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검증되지도 않은 강의 평가를 통해 교수들을 서열화하고, 제자들의 취업률까지도 교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마땅히 정부와 사회에서 해야 할 청년 취업까지 교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다 보니 교수들은 잘 가르치는 교수의 본분은 팽개쳐 두고, 쓸모없는 논문 제조나 취업 부탁, 신입생 유치를 구걸하러 다녀야 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교수라는 이름만으로도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말 없는 다수의 교수들은 과거의 그런 교수 시절을 그리워하기는 할망정 그 시절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묵묵히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유가 있다면 사회를 위해 자신의 전문적 지식으로 봉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교수에게 특별한 혜택이나 특권을 줄 수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 다만 교수 본연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 줄 필요는 있다. 많은 교수들의 이런 바람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교수에게뿐 아니라 나라와 인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결과로 작용할 것이다.

제발 교수들을 더 이상 흔들지 말고 조용히 연구하고 강의할 수 있도록 좀 가만히 놔두시라. 그게 교수들을 위한 최대의 예우이자 희망 있는 미래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자유방임의 분위기인 일본 교토대에서 일곱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보도도 있잖은가.

교수들이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지면 그 사회는 정체되어 썩어갈 수밖에 없다. 교수들이 정상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한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이자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동서고금의 대학 역사가 그것을 뚜렷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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