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제당터, 마을 품으로 돌아오다

반포면 하신리 산신제가 지난 11월 14일(음 10월 초하루) 자정 계룡산 임금봉 아래 산신각에서 거행됐다.

▲ 계룡산 임금봉 아래 하신리 산제당 전경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 지내는 하신리 산신제는 1954년 산제당을 짓기 훨씬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의 전통제례로 이날 산신제는 김영기 이장을 비롯한 제주 서원석(47)씨, 주민 김완태(74)씨와 유성준(55)씨 내외 등 주민들이 참석했다.

김영기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떡과 술, 그리고 과일 등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물을 지고 밤 10시 마을회관을 출발, 제를 지내기 전 조상들이 목욕재계한 하신천에서 세수를 한 뒤 산제당으로 향했다.

▲ 제주(祭主) 대문 앞에 부정한 것을 금하는 황토를 뿌렸다.

특히 올해 지내는 산신제는 더 소중한 의미가 담겨있다. 1926년 이래부터 하신리 마을 소유였던 산제당터가 1988년 영문도 모를 타인 명의로 변경되었던 것.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김 이장과 주민들은 지난해부터 자연신의 영역, 하신리 마을 공동자산인 ‘산제당터를 하신리 마을회로 반환하라’는 반환소송을 시작, 2012년 11월 6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으로부터 ‘하신리마을회’ 명의로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김영기 이장은 “우리 마을 주민들은 1954년 계룡산 임금봉 아래 산제당을 짓고 그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 모두의 건강을 오래 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한마음으로 기원을 드려왔다. 누군가 주민들 몰래 산제당 터를 임의 분할하여 처분하였을 그 해에도 하신리 공동체 가족들은 여느 해와 다르지 않게 정갈한 마음으로 치성을 올렸다. 그 한결 같은 마음이 하늘에 닿아 2012년 ‘경매’라는 마지막 위기를 넘겼다. 이는 ‘하신리 마을회의 반환’을 하늘 신과 땅 신과 산신에게 기원드리며 인력을 다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126가구 350여명 주민들의 한마음으로 이뤄낸 결과이자 산신령의 보우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앞 정자를 지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그동안 산제를 지내던 어르신들이 연로하고 산제당 건물 보수비가 만만치 않아 마을 기금으로 수리하기 어려웠는데 반포면에서 생활개선사업비를 들여 지붕을 보수하고 당안 마루와 뜰을 일부 보수했다.

이날 김영기 이장은 “하늘 신, 땅 신 그리고 올 한해 풍요로운 곡식을 거주게 해주심과 2차례 이상 강력한 태풍이 불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이 피해가 적게 보우하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또 산제당 터를 다시 ‘하신리 마을회’로 반환된 것에 대한 감사의 기원을 올립니다”라고 축문에서 밝혔다.

▲ 산신제를 지내기 전 하신천에서 몸을 정갈하게 씻는 주민들.

국립공원 계룡산 임금봉 아래 천혜의 솔 숲, 하신리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요체가 고스란히 담긴 마을문화재 1호 산제당은 1954년 3월 24일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신리의 산제당은 상신리의 산제당과 함께 반포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마을의례이자 계룡산의 정기를 받고 있는 반포지역의 지역의례이기도 하다.

또한 산제당을 둘러싼 백년 넘게 자라온 소나무 숲은 인근에서도 보기 드문 반포면의 자산으로 하신리 주민들은 1950년대(甲午년)건립된 산제당이 시나 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앞으로도 국립공원 계룡산과 더불어 잘 보존되어 자연을 경외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표상으로 남기를 기대하고 있다. 

▲ 제를 준비하는 장면

 

▲ 산신각에 차려진 제물과 향

 

▲ 김영기 이장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제를 지내는 장면.

 

▲ 주민 유성준씨가 소지를 올리는 장면.

 

▲ 주민 유성준씨가 제를 지낸 후 음복을 하고 있다.

 

▲ 1954년 산제당을 지을 때 올린 상량문(甲午 三月 二十四日 柱上樑)

 

▲ 제를 마치고 주민들이 모여 음복을 하고 있다.

 

 

상하신리 용둠벙 이야기

아주 오랜 옛날 이곳은 바다였다고 한다. 끝없이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갈매기 떼가 한가롭게 노닐고 기암절벽의 계룡산이 짙푸른 산림에 싸이고 지금 용둠벙이 있는 곳에는 커다란 신봉우리가 마치 섬처럼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이따금씩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낚시를 하였다고 하였는데 선녀의 모습이 주변의 경치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마침 계룡산에 들렀던 임금이 무심코 바다 쪽을 마라보다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선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왕은 마침내 배를 타고 선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임금은 선녀에게 자기에게 시집을 오면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녀가 거절하자 임금은 선녀를 잡아 가두도록 명령했고 급기야는 선녀를 방에 가두어 놓고 왕비로 삼았다.

이 같은 사연을 알게 된 옥황상제는 화가 나서 선녀를 용이 되게 하여 이곳 용둠벙에 살게 하였고 아름다운 선녀는 그만 하늘나라로 올라가지 못하고 용이 되어 물속에서 답답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임금은 선녀를 잊을 수가 없어서 자주 낚싯대를 들고 선녀가 앉았던 자리에 와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임금이 자주 와서 낚시질을 하던 봉우리를 임금봉이라고 불려졌고 신소 용둠벙이 아랫마을을 하신리, 윗마을을 상신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공주지명지(1997년 공주시 발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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