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溪 김재석(1916~1987)선생을 처음 뵌 곳은 1983년, 회덕 가마 시절의 이종수 선생 작업장이었다.

갓 군을 제대해 인사차 찾아갔던 나에게 때마침 찾아주신 봉계선생을 소개해 주시며 “한국의 근·현대 도예계를 이끌어 오신 巨匠이시다.” 라는 범상치 않은 말씀을 하셨다.

지금도 우람한 체격에 고품격을 갖춘 분으로 기억이 난다. 선생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양수리에서 만난 김영호 때문이다.

같이 합숙하며 도제기술을 배웠던 陶友는 바로 봉계선생의 막내 자제였다. 한국 근·현대도자의 첫 선봉장이신 선생이 충남 공주출생인 것도 알게 되었다.

선생이 탄생한 당시는 도자공장을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하며 기계제 생산형태로 ‘福’자 사발 종류를 대량 생산하였고 공예품의 질적 저하로 한국 전통 수공업체제의 붕괴가 서둘러 이루어졌으며, 뜻있는 몇 안 되는 분들에 의해 청자나 백자의 맥을 잇기 위한 시발점인 시기였다.

봉계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곧, 유학하여 동경예술대학교를 1940년에 정식 졸업하여 공예와 도안을 전공한 도예가로서 기존의 전승공예와 차별화시켰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현대적 개념인 공예의 출현을 앞당기며 이로써 우리나라 근·현대 도자공예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1943년 제22회 선전에서 공예부에 ‘철사병’과 ‘백자병’ 2점이 입선했고, ‘국화회’, ‘광풍회’, ‘백우회’ 등을 통해 작품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미술가협회, 조선공예회 등에 위원이나 회장으로 참여했다. 또한 1949년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국전 심사위원장과 국전 초대작가로 출품하기도 했다.

또 특기할만한 것으로 1954년 전남 광주에서 1958년과 1959년에는 각각 충남 공주와 전북 전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광복 이후 이화여대,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서라벌예대 공예과 (1960~1967년), 성신여사대(1967년)에서 도자기, 공예, 디자인 등을 가르쳐 도예교육에 기여하기도 했다.

봉계선생은 광복 이후 10년 동안 공식적인 작품 활동으로 도예활동을 한 유일한 인물이다. 물론 생계를 위해 사기그릇을 만들거나 옹기, 칠기 등을 만든 사람들은 있었지만 미술단체에 참여하고 전시회에 도자기 작품을 출품하며 국전 등에 심사위원을 한 사람은 1945~1955년 사이에 홀로서기 김재석 뿐이었다.

그가 광복 이후 공예 관련 단체에 참여하고 여러 전시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고 각 대학에서 공예나 디자인을 교육하며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함으로써 도예 부흥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으며, 거의 단절 되다시피 한 도자문화를 현대도예와 연결시켜 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지역에서 배출한 역사적 인물이 이 시기에 조명되고 그 의의와 뜻이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 그가 이 지역에 남긴 걸출한 유산은 도자예술과 더불어 공주적인 특성 있는 개념일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인 어려운 상황에서 어린 시절부터 백제문화의 찬란한 공예세계를 보고 자란 봉계선생은 그가 무엇인가를 하여야 할 사명을 저절로 습득하였을 것이며 그 꿈을 품고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주인은 그가 남긴 영원한 업적을 다시 재조명하고 헌장 하여야 하겠다. 백제인의 후손으로 당당히 전통공예를 이으며 근, 현대 도자의 선구자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자료제공에 도움을 주신 공주교대 구권환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님을 위한 그 첫출발은 당연히 추모비부터 세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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