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교육심리 첫 수업을 전후해서 수강 신청 기회를 놓친 학생들의 전화를 여러 번 받게 된다.

수강 정원을 미리 정해놓은 것은 그 정원을 초과하게 되면 수업의 질에 영향을 줄 것을 예상한 조치이다.

따라서 수강 신청 기회를 놓친 학생의 안타까운 사연과 이미 성실하게 수강 신청을 한 학생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매번 정원을 초과해버리곤 해서 지난 학기에는 처음부터 마음을 다잡고 전화로 하소연하는 학생들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드디어 개강하는 날, 출석부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마지막 학생의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더 이상 ‘제 이름이 없는데요...’하면서 나서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이번에는 정원을 넘기지 않았다고 안도하면서 수업을 끝내고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학생 두 세 명이 가로막는다.

예상대로 서식 한 장씩을 들이밀며 수업을 듣게 해달라는 거다. 참 난감하다. 수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면 거절하기가 쉬웠을 텐데, 이미 수업을 듣고 난 후라 매몰차게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몇 명이냐고 했더니, 손을 드는데 네 명이다.

그래, 네 명 정도 더 많은 것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좋다, 서류를 꺼내라 했는데……. 서류 한 장에 대 여섯 명씩의 이름이 있다. 같은 과 학생들끼리 모아서 왔던 것이다. 결국 15명이나 추가수강신청을 받고야 말았다. 선생보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녀석들이니 어쩌겠는가?

이 학생들의 추가수강신청 이유는 다양하다. 가장 흔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교육심리를 공부하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익힐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정의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물론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긴 하지만, 하나하나의 정의들은 부분적으로 옳다.

학생들의 정의를 종합해보면, 좋은 선생님은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고, 교육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실천하는 선생님이다. 즉, 교육의 전문가이다. 전공과목을 효과적으로 잘 가르치는 선생님은 학생이 이해할 수 있고 숙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제와 기능을 제시할 줄 안다.

또한 학생들의 주의를 끌고, 동기유발을 잘 하고, 학습자의 발달 수준을 파악하고, 학생들의 가정환경과 심리적 욕구 등을 잘 이해하는 선생님이다.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전문직이다. 교육심리학의 저자들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학습자에 대한 헌신적 소명감이다.

좋은 선생님은 당연히 교육의 전문가여야 하지만 전문적 ‘지식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넘어지면 혼자 일어설 수 있는지, 혼자 일어서기 힘들다면 뛰어가서 부축해주어야 하는지, 혹은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정서적으로 넘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교사는 언제나 정서적인 일회용 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TV에서 우연히 고추농사를 짓는 어느 농부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고추는 토양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 순간, 교육을 농사에 비유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학습자의 다양한 특성을 이해하고, 보다 효율적인 교수방법을 사용하고, 학습동기를 향상시키는, 교수와 학습과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전공영역의 지식이 풍부하고, 교육학 영역에서의 지식까지 풍부하게 갖추었다 하더라도, 애정 어린 따뜻한 관심으로 학습자를 대하지 않는다면, 학습자의 성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추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학생들이 올곧게 잘 자라려면 교사의 애정 어린 따뜻한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교육심리를 공부하는 것만으로 좋은 선생님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좋은 선생님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실천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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