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천의 병아리와 염소

글에 대한 소개

이 글은 ‘공주회’에서 발간한 <공주회 단신> 제10호(2000, 10)에 실린 소노다 씨의 '제민천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일문으로 작성된 글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소제목을 만들어 집어 넣었다.

▲ 제민천의 다리 (柳橋 <청란> 청란동창회 사진)

일본의 공주 출신 일본인 모임인 ‘공주회’는 <공주회 통신>이라는 간단한 책자를 매년 1회 발간하였다.

2012년 현재 65호가 간행되었는데, 이와는 별도로 부정기적으로 간단한 뉴스레터가 <공주회 단신>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적이 있다. 백제문화제 때 고향 공주를 방문하는 ‘공주회’의 회장 노무라(野村京生) 씨에 부탁하여 복사한 회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 글을 접하게 되었다.

3회로 나누어 게재하는 이 글은 어린 시절 평범한 일상의 기억을 되살려 꼼꼼히 적은 아름다운 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민천의 옛날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때마침 제민천을 ‘생태 하천’으로 되살리기 위한 사업을 바야흐로 진행중에 있는 참이라 이 글의 의미는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편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 충청남도 <우리문화즐기기 사업>의 하나로 공주 역사에 대한 원로 인사의 구술자료 채집 및 공주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작업도 금년에 진행되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이 글을 소개하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역자 씀)
                    
제민천의 병아리와 염소

1943년 4월, 나는 도키와소학교(常盤小學校, 지금의 봉황초등학교) 2학년으로 8살이었다. 하교하던 도중, 내 귀에는 제민천 둔치로부터 ‘삐약 삐약’하는 소리가 들렸다. 냇둑 위에 서서 보니까 여기 저기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이 있었다. 10마리, 20마리, 30마리나 있었다.

암탉이 ‘꾸, 꾸’하고 울며 걷는 뒤로, 병아리들은 쫑쫑대며 걷고 있었다. 어느 암탉이나 열 두 세 마리의 병아리들이 따르고 있었다. 암탉은 갈색이었다. 병아리는 10마리정도가 샛노란 색깔이었다. 나머지 두 세 마리만 몸 일부가 거무스레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왜 병아리만 그렇게 노랗지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보는데 싫증난 나는 작은 돌멩이를 주어 몇 번이나 던졌는데, 한 번도 맞추지 못했다. “불쌍하니까 그만 두지”하고 던진 마지막 돌이 병아리에 맞았다. 병아리는 죽을 듯 울며 날개를 퍼득거리며 그 자리에 웅쿠렸다.  나는 집을 향하여 쏜살같이 내달렸다.

1944년 4월, 도키와소학교 3학년, 우리나이(세는 나이)로 9살이었다. 병아리가 딸린 암탉 수는 작년보다 엄청 줄었다. 제민천 둔치에는 몇 마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생전 처음으로 염소가 새끼를 낳는 풍경을 보았다. ‘어머니’가 목욕탕에 있는 탈의용의 평평한 망태를 가지고 나와 염소의 엉덩이에 댔다.

거기에 머리를 움직이며 염소 새끼가 나와 툭  떨어졌다. 어미 염소의 엉덩이에서 분홍색 풍선(風船)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새끼 염소가 들어간 망태를 가지고 걸어나오자, 어미 염소는 ‘메-, 메-’하고 울면서 줄곧 ‘어머니’ 뒤만 쫓는 것이었다.

어렵게 난 새끼를 사람에게 빼앗긴 어미 염소가 가엾게만 느껴졌다. ‘어머니’는 새끼 염소를 안고 돌계단을 올라가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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