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兵, 强大處下, 柔弱處上.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老子의 말은 어렵고 수수께끼 같다. 사람들은 웃고 울고 느끼고 생각하지만 누가 나를 웃고 울고 느끼게 하는지 알 수 없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 作用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道이다. 강풍과 회오리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고 모래먼지 등이 날아간다.

江邊의 갈대나 억새풀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갑자기 바람이 멈추면 모든 만물이 고요히 제자리에 머문다. 무엇이 만물을 요동치게 하고 다시 고요하게 하는가?

바람이 그러하게 하였다면 바람은 누가 시켜서 심술궂게 만물을 요동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인가? 

이 수수께끼의 정체를 누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것의 정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가?

碧巖錄 46則 鏡淸雨滴聲 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문밖의 저게 무슨 소리인가?”

“개구리가 뱀에게 잡혀 먹히는 비명소리입니다.”

“개구리가 뱀에게 잡혀 먹히는 소리를 듣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이 불쌍한 놈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

개구리가 뱀에게 잡혀 먹히는 절체절명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구리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개구리의 비명소리가 나의 비명소리이며 나의 비명소리가 개구리의 비명소리인 도리를 알면 개구리를 살릴 수 있지만 개구리의 비명소리는 개구리의 것이고 나의 비명소리는 나의 것이라는 구별을 가진다면 필경 개구리의 목숨은 살릴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알고 모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만물과 내가 어떻게 契合하여 하나가 되느냐 하는 直觀과 體認, 體得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莊周의 말대로라면 眞知는 사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고 ‘不知’라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이것이 道(진리)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비로소 道를 아는 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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