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린다. 틀림없이 신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집에 들어왔는데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 이곳저곳 찾아다니다가 욕실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빼꼼이 고개를 들이밀고는 씩 웃으면서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이여~” 어쩌구 한다.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가보다.

얼마 전에도 거의 유사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 때는 “운동 좀 해라. ×배 봐라~” 이랬던 신랑이 르느와르를 들먹이니까 웃음이 나왔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출처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상담자를 화가와 안과의사로 비유한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상담자는 자기가 그리고 싶은 데로 내담자를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내담자가 자기 스스로 잘 보도록 눈을 닦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지였던 것 같다. 사람은 본인을 알게 되면 스스로 변화하게 되어있다는 Bio-Feedback원리를 설명했던 것 같은데......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통통한 나를 기분이 좋을 때는 ‘르느와르의 여인’으로 보고,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는 ‘뚱뚱한 아줌마’로 보는 신랑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치면서 ‘눈을 닦아주는’ 사람이기 이전에, ‘내 눈을 닦는’사람이 먼저 되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요즘 질적 연구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를 분석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와 관련된 자료들을 이것저것 찾다가 발견한 노트의 일부분이다. 그 당시에는 제법 성찰을 한 것 같은데,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내 눈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는’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의 작업 기억은 기억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고, 그 작업 기억의 용량은 7±2라고 Miller라는 학자는 주장한다. 작업 기억은 감각기억의 필터를 거쳐서 기억된 것일 수도 있고, 장기기억의 저장 공간에서 잠시 우리의 작업대로 인출해 온 것일 수도 있다. 이 장기기억에서 인출해 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장기기억에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저장을 효율적으로 잘 해놓으면 해놓을수록 작업 기억으로 정보를 가져오기가 수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청킹전략을 사용한다.

청킹전략이란 서로 관련된 여러 자료를 하나의 정보 또는 묶음으로 인식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청킹방법의 아주 작은 차이로 말미암아 의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되어버린다. 즉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청킹전략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예를 보자.

“THEDREAMISNOWHERE”라는 문장을 청킹하는 방법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THE DREAM IS NOW HERE”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THE DREAM IS NO WHERE”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즉, 정보를 저장할 때도, 인출할 때도 우리의 심리상태에 따라 정보가 왜곡될 수 있다.

내 마음이 행복할 때는 행복한 느낌으로, 슬플 때는 슬픈 느낌으로 저장되거나 인출되기가 쉬운 것이다. “THE DREAM IS NOW HERE”이라고 청킹하는 사람의 기분은 긍정적인 느낌이 우세한 상태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우의 사람을 자기존중감이 높다고 말한다.

“THE DREAM IS NO WHERE”이라고 청킹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느낌이 우세한 상태, 즉 자기존중감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르느와르의 여인’이건 ‘뚱뚱한 아줌마’이건 간에 실체는 변함이 없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르느와르의 여인’으로 인식이 되고, 기분이 나쁠 때는 ‘뚱뚱한 아줌마’로 인식되는 것이다. 즉, 감정 상태에 따라 똑같은 사건이나 현상이 다르게 인식되고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의 왜곡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기억의 왜곡현상과 대비되는 현상이 있다.  ‘정서적 격리(emotional isolation)’현상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인식할 때 정서기능은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고 사고기능만 비대해지는 현상이다. 이렇게 기능적 사고에 고착된 사람들은 사건이나 상황을 기억하는 방식도 좀 특별하다.

사건이나 생각은 자동적이라고 할 만큼 정확하게 기억되지만 그 사건에 수반되는 정서는 거의 휘발되어 기억되지 않는다. 정서 상태에 따라 기억이 왜곡되기도 하고, 기능적 사고에 고착되어 정서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기억은 믿을 게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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