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정다운 사람들과 마주앉아 차 한 잔 나누기 좋은 계절입니다.

요즘 대세인 커피도 좋고 풋풋한 내음과 배릿한 향이 우러나는 녹차도 좋고 찻잎을 발효시켜 붉은 빛으로 우려내는 보이차도 좋습니다.

차(茶)에는 우리네 소원했던 관계를 개선하고 번민을 잠재우는 묘약이라도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 만나면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보다는 “언제 차 한 잔 합시다.”라는 인사가 더 정겨우니까요.

나도 절에 오시는 분이면 누구라도 “차 한 잔 하시고 가십시오.”하고 심우실을 개방하는 편인데 차 한 잔을 나누는 동안에는 번다한 세속적인 이야기 내려놓고 맑은 이야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중에 부모들과 같이 온 아주 어린 아가들 즉 유치원이나 다닐 아가들이 차를 거침없이 마시며 “한잔 더 주세요” 하고 턱을 받쳐 들 때 제일 예쁘게 느껴지니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천진동자가 따로 없습니다.

요즘 원효사 초입에 십여 년 전 조성해 놓은 작은 차밭에는 차 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흰색의 꽃 이파리와 노란색 수술로 된 차 꽃을 보고 탐심이 일어 막 피어나는 차 꽃 하나를 따다가 찻잔에 우리면 가을을 머금은 자연의 은은한 향기로움이 몸 안 가득히 피어오름을 느낍니다.

작은 차밭 하나 있는 것이 큰 기쁨인 것은 일창이기로 올라오는 여린 햇찻순을 따서 구증구포로 덖지 않고 그냥 차를 내어 마셔도 무한정의 행복감을 불러오고 차 꽃 하나만으로도 오시는 분들에게 맛과 속이 깊은 찬사를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 하였다고 하고 추사 김정희는 초의스님으로부터 차 한 봉지를 전해 받고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라는 글을 써서 답하는 등 맛과 멋과 향이 어우러진 찻자리는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공주에도 차인이라 불리울만한 분이 머물러계셨던 적이 있으니 반포면 충현서원에 모셔져 있는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이라는 분입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일찍 요절하였지만 한재가 남긴 다부(茶賦)라는 글에는 차의 덕을 칭송한 일곱 주발의 차라는 칠완다가가 남아있으니 이번에 같이 감상하기를 청합니다.

첫째 주발에 마른 창자가 깨끗이 씻겨 지고 둘째 주발에 상쾌한 정신이 신선이 되려 하고 셋째 주발에 병골(病骨)에서 깨어나고 두통이 말끔히 나은 듯하며 이내 마음, 공자가 부귀를 뜬구름 같이 보았던 것처럼 뜻을 높이 세우고 맹자가 호연(浩然)하게 기(氣)를 길렀던 것과 같도다.

넷째 주발에 웅장하고 호방한 기개가 피어나고 근심과 울분이 사라진다. 내 기운,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던 것과 같으니 아마도 이러한 경지는 하늘과 땅으로도 형용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주발에 색마(色魔)가 놀라서 달아나고 게걸스런 시동(尸童)도 눈멀고 귀먹으며 이내 몸, 구름 치마에 깃털 저고리 입고 흰 난새를 월궁(月宮)으로 채찍질하여 가는 것 같도다.

여섯째 주발에 해와 달이 방촌(方寸 : 心)에 들어오고 만물이 대자리만 하게 보인다. 내 영혼은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를 전구(前驅) 삼고 백이와 숙제를 종복(從僕) 삼아 현허(玄虛)에서 상제(上帝)에게 읍(揖)하는 것과 같구나.

어쩐 일인가, 일곱째 잔은 아직 반도 마시지 않았는데 울연히 맑은 바람이 흉금(胸襟)에서 일어나네. 하늘문[天門] 바라보니 무척 가까운데 울창한 봉래산(蓬萊山)을 사이에 두었구나.

또 한재는 차에 오공육덕이 있다 하였는데 먼저 ‘오공’에서는 첫째 밤이 이슥하도록 독서에 열중할 때 목마름을 풀어주고, 둘째 답답한 가슴속의 울분을 풀어주고, 셋째 빈례시(賓禮時) 빈주(賓主) 사이에 예를 지키고 정을 돈독하게 하며, 넷째 뱃속의 기생충을 구제하고, 다섯째는 숙취(宿醉)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육덕’은 첫째 사람의 수명을 닦게 하니 제요(帝堯)나 대순(大舜)의 덕이 있는 것이요, 둘째 사람의 질병을 낫게 하니 유부(兪附)나 편작(扁鵲)의 덕이 있는 것이요, 셋째 사람의 기를 맑게 하니 백이(伯夷)나 양진(楊震)의 덕이 있는 것이요, 넷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니 이로(二老)나 상산사호(商山四皓)의 덕이 있는 것이요, 다섯째 사람을 신선이 되게 하니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덕이 있는 것이요, 여섯째 사람을 예의 바르게 하니 주공(周公)과 공자의 덕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차를 한잔부터 시작하여 일곱 잔에 이르고 보니 운운하는 구절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해가 맑은 아침에 일곱 잔의 차를 내어 마시며 한재의 경지를 엿보고 있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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