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아프리카·중동한인회 총연합회 임도재 회장이 공주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를 받았던 지난 11월 28일의 일이다.

임도재 회장의 업적과 사회적 공헌은 과연 존경을 받고도 남을 만큼 훌륭하였고, 학위수여식 또한 성대하고 정중하게 잘 치러졌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날의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 따로 있었다.

혼자만 기억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자리가 될 때마다 이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이야기는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회장의 짧은 건배사에서 나왔다. 이 회장은 공주대학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범대학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카이는 로마군의 침략을 받아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했을 때, 로마의 대군을 상대로 하여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보전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을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로마의 대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최후의 결전을 각오하는 강경파와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걱정하는 온건파가 있었다. 온건파에 속하는 자카이는 고심 끝에 그가 병이 들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 다음에 그는 산 채로 관 속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로마군의 감시를 뚫고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가까스로 로마의 장군 티투스와 담판의 자리에 서게 된 그는 티투스가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한편, 한 가지 요구를 들어달라고 간청했다. 열 명이나 스무 명의 랍비가 들어갈 수 있다면, 조그만 방이라도 좋으니 학교를 인정하고 파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머지않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성전 파괴는 물론이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티투스는 자카이와 약속했던 랍비학교는 보전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중서부 해안 도시 얌니아에 세워진 랍비학교라고 한다.

농부는 흉년이 들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씨앗만큼은 손에 쥐고 죽을지언정 결코 삶아 먹지 않는 법이다. 자카이로부터 시작된 랍비학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스라엘의 언어, 문자, 역사, 문화, 종교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천여 년에 걸친 참담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끝내고, 오랜 옛날 그들의 조상이 살던 이스라엘로 돌아가 옛 이름 그대로 그들의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재건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했던 근원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교육보다 더 절실한 까닭은 없다. 교육만이 소리 없이 조용하게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온전한 방법이다.

정치는 권력을 내세우지만 압제를 가하게 된다. 경제는 재화를 생산하지만 빈부격차로 시끄럽다. 전쟁은 과격하여 무서운 희생을 초래한다. 반면에 교육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여 자유, 평등, 생명을 위해 소리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아마 요하난 벤 자카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 생각처럼 이스라엘의 조용한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예로 들어 공주대학교에서 사범대학이 가장 중요한 대학이라고 한 이형모 회장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회장의 건배 순서가 끝난 뒤, 나도 건배를 자청하였다. 자카이의 랍비학교를 이스라엘의 최초의 사범대학으로 보고, 교육과 사범대학의 위대한 힘을 일깨워 준 이 회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여럿이 모인 자리에 잘 나서지 않는 편이지만, 그날만큼은 조용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조용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교육이 돈이나 권력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데 이 이야기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을 것이다. 사범대학으로부터 시작된 공주대학교가 근래에 겪게 되었던 어려움을 생각하더라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학무위원들과 다른 손님들에게 이 회장의 이야기를 빌려 사범대학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강조했던 것이다.

짧은 글로 그날의 감동을 다 옮기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 나는 사범대학장으로서 최소한의 밥값은 한 셈이고, 그날 이형모 회장이 우리들에게 차려준 밥상을 다 비웠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밥값 대신 이 이야기를 계속할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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