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에 명절과 절기를 제외하고는 지역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단위 행사가 미천하던 시절 백제문화제는 이곳사람들에게 백제망국의 설움을 달래주는 한편 고대왕국의 수도였고 찬란한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라는 자부심도 함께 가질 수 있었던 전국 3대 축제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옛날 백제문화제를 참여했거나 기억하시는 분들이 이곳 공주에 많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필자 역시도 공주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남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만든 구슬장식을 한 통성냥각 족두리를 쓰고 왕·왕비의 시녀 중 한명으로 출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학생동원은 당연한 시절이었기에 백제문화제 행사 한 달 전부터는 오후 수업시간에 학업대신 행사 참여 연습을 열심히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제문화제는 1955년 부여군민들이 민간 주도로 부여 부소산성에 재단을 쌓고 백제 3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에게 제향하고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 수륙제를 펼치면서 백제대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공주 역시 향교집전으로 매년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추모하는 사왕추모제가 봉향되던 중 부여의 백제대제가 종합축제화 되는데 자극을 받아 1966년부터 부여와 동시개최를 하였고 다음해인 1967년에 백제문화제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진행되어 오던 백제문화제는 1979년 25회 때부터 공주, 부여 격년제로 개최하였고 2007년부터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공주, 부여 동시개최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민간 주도로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우여곡절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백제문화제는 이완구 전 충남도지사의 중요정책 중 하나가 되어 충청남도의 적극적 참여로 백제문화재단 및 추진위원회가 발족이 되었고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예산투입으로 인하여 외형확장에는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순기능 뒤에는 큰 예산 운영에 따른 관 주도의 운영시스템과 수준 높은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지역예술인들의 주도적 참여가 결여되고 있다는 역기능도 함께 동반되니 예술가의 한사람으로서 개탄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지난 수년간 많은 예산투입으로 인한 결과가 시설물이나 경관을 돋보이는 하드웨어 쪽에 쓰여 졌다면 이제는 60년의 내공이 쌓인 축제답게 그 이야기와 정신을 만들어 내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인 축제의 운영시스템이 많이 변하고 있다. 60년 된 축제도 흔치 않다.

올해 맞이하는 백제문화제는 먹은 나이만큼 노쇠해 보이지 말고 더욱 진취적이고 많은 사람과 공유해 나가는 청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필자가 백제문화제 추진위원회 집행위원 시절 당시 이완구 전 충남지사의 백제문화제에 대한 짧은 견해를 끝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굳이 기억을 더듬어 지나간 얘기를 되새기는 이유는 아직도 백제문화제가 그가 꿈꿔왔던 것처럼 가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오 회장, 내가 왜 백제문화제를 많은 돈이 드는데도 이렇게 크게 하는 줄 아시는가? 나는 말이야 백제문화제를 통해서 우리 충남도민들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선조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고 싶어. 그게 문화의 힘이고 나가서는 충남의 힘이 될 것이야! 그러려면 어떡해야해? 우선 백제문화제라는 축제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 크게 하는 거야. 크게 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