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호흡할 수 있는 넉넉한 여백의 화면, 숨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오른쪽 위부터 천천히 읽어보자.

취후관화, 단원이라고 세로로 화제와 요즘말로 사인이 있다. 왼쪽으로 곧은 대나무 숲과 두 마리 학이 놀고 있다.

그 아래에 기와를 올린 집이 있고, 그 집 안에 술병과 두루마리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집 안으로 들어 와 함께 이야기를 거들고 싶어 기웃거리는 처마로 휘어진 매화가지가 멋스럽게 흥을 살린다.

나이든 매화나무와 괴석, 중국 남쪽이 원산지인 관음죽, 평상 위에 그릇이 있다. 물이 흐르듯이 그림을 읽어 내려오니 화로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뭔가가 끓는다.

아마도 차인 듯싶다. 임포(林逋)는 기별 없이 찾아온 반가운 벗과 그림, 글씨, 책,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술도 한잔, 차도 한잔하며 요기를 할 모양이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넨다. 매화까지 셋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서호(西湖)부근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매화를 아내삼고 학을 아들 삼아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낸 화정선생(和靖先生) 임포의 고사를 이야기로 풀어낸 그림이다.

말없이 바라보고 있어도 이심전심(以心傳心), 서로 마음이 전해진다.

이 그림을 보며 얼마 전 쌍달리 산골에 불쑥 찾아와 함께 머물며 좋은 얘기와 그림, 글씨, 술을 함께 나눴던 Y와 P가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순간, 준비된 이별은 없다고 했던가?

준비해도 준비가 되지 않는 이별은 살아있는 이를 당황하게 한다. 집안 어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허무감에 빠진 나를 일상의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들은 날 찾았던 것처럼 불쑥 그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衆芳搖落獨暄姸, 많은 꽃들 다 시들었을 때 홀로 예쁘게 피어,
占盡風情向小園. 자그마한 정원의 아름다운 정취를 독차지하네.
疏影橫斜水淸淺, 희미한 그림자는 횡으로 맑은 물 얕은 곳에 비껴 있고,
暗香浮動月黃昏. 그윽한 향기는 황혼 무렵의 달빛 속에서 풍겨 온다.
霜禽欲下先偸眼, 흰 새는 내려오려고 먼저 살짝 쳐다보는데,
粉蝶如知合斷魂. 흰 나비가 안다면 마땅히 애를 끊으리라.
幸有微吟可相狎, 다행히 나지막하게 읊조려 서로 친근해질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尊. 단목 악기나 금 술잔이 모두 필요치 않다네.

山園小梅 (산원소매), 林 逋(임포)지음/ 산속 정원의 작은 매화
<임포 시선> 임원빈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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