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사용 여부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그 나름의 소리, 혹은 다른 수단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걸 언어라고 할 수는 없다. 언어는 음성이나 문자를 통해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언어를 넓은 의미로 볼 때는 비언어적, 반언어적 표현도 포함하지만, 몸짓이나 표정 등의 그것은 언어를 보조하는 기능이 더 강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언어는 분절적 음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거나 생각을 나타내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언어는 언제, 왜 생겼을까.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문적 접근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에 관해서 몇 가지의 이론들이 나와 있다.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라는 것부터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의 필요성에서 이루어진 약속(계약)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런 이론들은 논리적으로 증명이 어렵기 때문에 학문으로 다루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발생을 살피는 데는 아기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참고하는 것이 유용하다. 갓 태어나 누워 있는 아기는 당연히 말을 하지 못한다. 아기들이 세상에 나와 처음 내는 소리는 옹알이다. 그런데 이 옹알이는 분절적 음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 엄마와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한다 해도 그걸 언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옹알이를 거쳐 어른들이 사용하는 언어 비슷한 걸 말할 수 있는 시기는 대체로 첫돌 무렵부터다. 이 시기에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직립과 보행이다. 이 직립과 보행의 시작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신체 생리적 변화 때문이다.

즉 이 시기에 어른과 유사한 조음 기관을 갖추게 되는 것은 물론 호흡의 과정에서 분절적 발음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 생리적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 중에 갓 두 돌 지난 손자가 있다. 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면서 이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돌 무렵의 언어는 당연히 부정확한 발음으로 어른들의 언어를 흉내 내는 단계다. 이때 어른들은 아이의 발음을 그대로 반복하여 성취감을 높여줄 필요가 있다. 성급하게 어른들의 발음을 강요하는 것은 자칫 언어 습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우리 가족 사이에서 아이와 소통하는 몇 개의 단어가 있다. ‘난지’, ‘앙강’, ‘콩따빠’ 같은 어휘들이 그것이다. 아이와 우리에게 ‘난지’는 계란을, ‘앙강’은 고양이 인형을, ‘콩따빠’는 콩나물을 지칭하는 단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 안 되는 생소한 표현이겠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 불편 없이 이 단어들로 아이와 소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과를 ‘애플’, 산을 ‘야마’, 학교를 ‘에꼴’이라고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언어 행위인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의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처럼 단음절의 단어에서 두 음절, 세 음절의 단어 사용과 함께 짧은 문장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언어의 확장 과정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어른들의 언어를 모방하여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그 발음과 유사한 데까지 이르는 성취 또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포기를 모르는 그 끈질긴 노력이 결국 아이의 언어를 완성시키는 근본적 힘이 되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려서 습득한 모어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어의 고마움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언어를 오염시키고 훼손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함부로 내뱉기도 한다. 아기 시절 직립을 위해 수없이 넘어졌던 것처럼 어렵게 언어를 습득했던 과정을 상기하면 언어를 이렇게 홀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흔히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생각하나 실은 우리의 기억과 사고 작용 모두 언어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가 없다. 나아가 언어는 우리의 의식 그 자체이며 인류의 위대한 유산 또한 언어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드물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이처럼 언어에는 혼이 깃들어 있고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있다.

한번 밖으로 나온 언어는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취소하기도 어렵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말은 그 힘이 더욱 크다. 그런 사람일수록 말을 더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정치의 계절을 맞아 무수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심지어 정당 대변인이라는 고위직들은 폭력에 가까운 언어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판이 난장판이 되어가는 원인 중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아름다워지려면 가장 먼저 언어가 아름다워져야 한다. 곱고 바른 말을 사용하면 그 사람의 정신과 의식이 바르고 고와진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무심히 사용하는 자신의 언어를 조용히 되돌아보자.

그리고 말을 할 때 속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을 하자. 이런 작은 노력이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를 더욱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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