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제리코(J.L.A. Theodore Gericault, 1791~1824) 491×716cm, 파리 루브르박물관, 1819년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한명희 시 장일남 곡

6월 달력을 본다. 현충일, 6.25전쟁(1950), 제2연평해전(2002)은 알겠는데, 봉오동 전투(1920), 6.10만세운동(1926) 등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알 법한 사건이, 국가보훈처, 광복회에서 만든 달력이어서 사건이 좀 더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비극적인 사건이 꽤 많았던 6월, 가곡 비목이 떠오른다.

벌써 한 달 반이나 지난 세월호 침몰사건은 1816년 메두사호 난파사건과 닮은 것이 있다. 1816년 메두사 호는 392명의 승객을 태우고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로 향했다.  메두사호 함장은 왕당파 귀족 출신으로 항해 경험이 없는 쇼마레였다. 그는 암초지대를 무리하게 질러갔고 얕은 바다의 모래톱에 걸려 배는 좌초되었다.

장교와 귀족들은 구명보트에 타고, 나머지 사람들은 난파선의 잔해로 뗏목을 만들어 옮겨 탔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선장은 구명보트로 끌어 주겠다던 약속을 믿고 뗏목에 올라탄 149명과 승객과 연결된 밧줄을 끊어 버렸다.

또 선장은 함께 출항했던 소형 범선 아르구스 호를 좌초지역으로 보냈는데, 승객구출의 목적이 아니고 90,000여 프랑의 금화와 은화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물과 식량이 없는 뗏목이 12일 동안 표류하는 사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15명이 생존한 상태에서 나중에 아르구스 호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5명은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 두 사람이 증언한 15일간의 참혹했던 당시 상황이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진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는 생존자를 만나 당시 상황을 전해 듣고, 뗏목을 만들어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등 치밀한 준비와 습작과정을 거쳐 그림을 완성했다. 죽은 사람들,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노인, 멀리 아르고스호의 돛대를 발견하고 옷을 벗어 흔드는 사람들,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몸을 일으키는 사람 등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1819년에 완성한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은 승객보다 자신들의 목숨을, 그리고 돈을 먼저 생각하는 무능하고 욕심많은 무리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사건을 현재,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삼가 세월호 침몰로 인해 죽임을 당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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