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에서 현대미술까지 문화코드로 세계적 관광국과 문화강국이 된 프랑스”

◇ 구석기 문화 코드로 시작된 문화강국 프랑스로

2014년 2월 10일 새벽 4시 20분. 집사람이 “늦었어요, 빨리 일어나요”라고 소리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 이상하네, 어제 분명 네 시에 알람이 울리게 해 놓았는데” 여하튼 급하니까 간단히 면도하고 세수한 후 부랴부랴 콜택시를 불러 공주대 정문 주차장에 도착하니 4시 45분이었다.

▲ A 프랑스 니스 / B 프랑스 또따벨 / C 프랑스 레제지 D 프랑스 리모주 / E 프랑스 파리 / F 벨기에 브뤼헤

25인승 관광차는 있는데 다른 일행들은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휴 그래도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 조직위원장 체면은 섰네.” 인천 공항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9시 50분에 비행기 탑승. 우리의 에어 프랑스는 10시 30분에 이륙하여 시속 800Km 지상 11,000m로 북서쪽으로 항진하고 있다.

요번 여행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석기 문화를 둘러보고 석장리 박물관의 관광 활성화 방안 및 세계구석기 축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함과 동시 세계구석기 학자 및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하는 뜻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의 여행지가 대부분 프랑스의 오지이며 구석기 유적 중심으로 계획되었고 참석 인원도 구석기학자 또는 조직위원 중심으로 짜여 진 것도 이러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 구석기인의 교육(문화전승)
특히 프랑스가 구석기 문화를 어떻게 관광과 연결하고 있는지, 또 프랑스가 어떻게 세계 제1의 구석기 연구의 메카가 되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생각도 있었다. 여행이라면 어디를 무슨 용무로 가든지 나는 늘 긴장되고 흥분되어서 좋다.

11시 20분 뽀하이 만 상공, 13시 30분경 바이칼 호를 향해 항해하는 우리 비행기의 밑으로 눈 싸인 시베리아가 펼쳐지는데 그 중 저지대의 남쪽은 눈들이 녹아 갈색의 수림도 간간히 눈에 띈다. 16시경 옴스크 위쪽 서시베리아저지대. 눈 속에 쌓인 산과 강과 호수, 늪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무늬가 예술품보다 더 뛰어나다. 1시간 쯤 눈을 붙였는데 그 뒤엔 통 잠이 오지 않는다.

저녁 5시 반경 우리는 우랄 산맥을 통과하고 있다. 비행기 아래 넓은 평원지대에 남북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산줄기가 흰 눈으로 덥여있는데 저기가 바로 내가 지리 시간에 가르치던 우랄 산맥이다. 우랄 산맥은 고기 산지이기 때문에 그리 높은 산지는 아니다.

창가에 앉아있는 이해준 교수에게 쫓아가 우랄 산맥을 설명해주니 순간적으로 남북으로 선명하게 뻗은 우랄 산맥 모습을 찰칵하고 카메라에 담는데 그 순발력이 대단하시다.

우랄 산맥을 넘어 여기서부터는 Europian Russia 이다. 19시, 모스크바를 통과하여 항공지도에 상트페테스부르그가 보이고 이어서 북쪽으로 핀란드 만이 나타난다. 이제는 동유럽 쪽으로 들어선 것이다. 20시 발틱 해 상공, 온 거리 7,367Km, 남은 거리 1,531Km 이제 두 시간 가량 남았다.

9시 50분 경. 파리 상공 도착 10시 10분 공항 착륙. 꼭 12시간의 비행으로 약 8,900Km를 날아왔고 파리의 기온은 섭씨 영상 7도, 해발 92m이며 이곳 파리 시간으로 지금은 오후 2시 10분이다. 이곳에 날아오면서 우리는 8시간을 벌은 것이다.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4시간을 대기하다 니스로 가는 6시 반 비행기를 갈아탔다. 비행기의 오른쪽에는 석양의 아름다운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있다. 8시 우리는 지중해변의 휴양도시 니스에 도착했다. 잠이 많이 쏟아진다. 20시간 즉 거의 하루를 자지 못한 것이다.

니스 공항에 내리고 나서 버스로 이동하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내가 일행에게 “어 지중해식 기후는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데?”라고 얘기를 했다. 지리 선생님 출신이 그렇게 말하니 다들 그런 줄 알았다는 듯이 별 얘기가 없다.

▲ 구석기 발굴 현장

그러다 한참 후에 잘 생각해 보니 ‘여름은 고온 건조, 겨울은 온난다우’라는 지중해식 기후의 특징이 생각났고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아마도 하루 동안 꼬박 잠을 못잔 이유로 정신이 약간 혼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일행들에게 내가 착각했다고 애기하고 지중해식 기후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었다.

이렇듯 장기간 비행기 탑승에서 시차 적응은 건강관리와 여행의 질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여행에서는 시차 적응을 잘했는데 요번 여행은 시차 적응에 실패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밤 9시 호텔 RIVIERA 도착. 늦은 저녁을 하고 10시 반에 억지로 잠깐 잠이 들었는데 2시에 깼다. 따져보니 한국의 아침이다. 시차 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5시에 아침 운동을 나섰다.
 
◇ 박물관과 아파트의 절묘한 상생(相生) 떼라아마타 박물관

봉쥬르(Good morning), 룸메이트 이해준 원장과 함께 니스 해변을 돌아보았는데 바닷가에 대형 무대를 만들고 간이 관람석을 설치한 것을 보니 축제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정말 며칠 후면(2월 15일)이곳에서 세계적인 니스 카니발이 열리는데 너무 아깝다.” 넓은 광장에 형형 색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기둥위에 올라앉았는데 이 사람들은 유명한 조각품이다.

이름 하여 ”니스에서의 대화“로 스페인 출신의 조각가이자 설치 미술가인 하우메 플렌사의 작품이다. 멀리 떨어져서 잘 바라보니 기둥위에 앉은 사람들이 정말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이 유명한 마세나 광장. 니스 출신의 프랑스 혁명 장군 앙드레 마세나(1758~1817)를 기리는 광장이다.

▲ 마세나 광장의 축제 간판
마세나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서 많은 승리를 이끈 장군이다. 7시에 식사를 마친 후 8시 30분 대형 버스에 올라 ‘테라 아마타 박물관’으로 향하였다.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며 신생대 제 4기의 퇴적층들이 보이며 이 지층들은 선사유적을 발굴하는데 중요한 지층이 된다면 구석기문화층 연구의 대가이신 공수진 박사님이 말씀하신다. 언덕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푸른 지중해변과 붉은 색의 집들 그리고 멀리보이는 알프스 최서단의 흰 눈 쌓인 연봉들을 보니 정말로 환상적인 경치이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도착했는데 웬 아파트 단지이다. 설명을 들은 즉 이곳은 니스 해변으로 땅값이 엄청 비싼 곳인데 아파트건설을 하려고 1965년 땅을 파 내려가는 중 수많은 사람의 뼈와 석기가 발견되었다.

즉 구석기의 문화층이 발견된 것이다. 이어서 66년 룸리(Henry de Lumley)교수가 이곳으로 달려왔고 조사 결과 약 40만 년 전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와 석기, 불 자리 등이 확인되었다. 그로인해 학자들과 건설회사 사이에 유적의 보존과 개발의 갈등으로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단다.

그러다 수많은 토론과 회의를 거쳐 니스시가 건물의 1층을 사들여 박물관을 짓고 그 위로는 계획대로 아파트를 건립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정말로 환상적이고 절묘한 상생 안이 도출된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 주민들도 좋고 박물관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오고 주변 사람들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 장사도 하고 하여 일석 삼조라는 설명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백이 아니면 제로,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우리나라의 제로섬 게임과는 너무 다른 현명한 판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조건적인 투쟁과 쟁취가 아니라 진지한 대화와 토론으로 이러한 상생의 해법이 정치권을 비롯해 공동생활의 많은 곳에 적용되어야만 할 것이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9시 30분 박물관에 도착했다. 엉셩테(만나서 반가워요), 니스市의 부시장 마를랑 밀리테로와 박물관장 루셀이 우리를 영접한다. 부시장은 여성인데 한껏 멋을 내고 나왔고 우리를 정성스럽게 영접한다. 입담 좋은 우리 시장님이 내가 본 공무원 중에서 최고의 미녀라고 여성 부시장을 추켜세우니 부시장도 싫지 않은 눈치이다.

우리는 기념품을 서로 교환하고 내가 정식으로 부시장에게 세계구석기축제를 홍보하였다. 니스에 많은 분들이 한국을 찾아줄 수 있도록 부탁을 하였고 마를랑 밀리텔로는 흔쾌히 협조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부시장이 떠난 후 우리는 박물관장의 안내로 박물관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긴 나뭇가지를 땅에 대어 맞배지붕 형태로 만든 막집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곳을 관람하며 느낀 신선한 아이디어로는 당시의 구석기인들이 살던 이 막집 모형을 재현하고 파도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녹음해서 박물관의 백 그라운드 음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 떼라아마타 박물관

그로 인해 우리는 마치 40만 년 전의 구석기인이 되어 지중해변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장 루셀은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개방하지 않는 수장고도 개방하여 우리를 안내하고 국보급의 뗀석기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다. 

12시, 나폴리 피자로 점심을 마치고 13시 니스 해변을 걸어서 이동하여 라자레 동굴의 고인류연구소로 이동하였다. 석회암이 녹아 흘러내리는 지중해 해변의 해안가 물빛은 약간 우유 빛을 띠었으나 전반적으로 짙푸른 지중해 물빛은 환상적인 모습(이 지중해 해안 지역을 프랑스 말로 ‘코트 다쥐르’라 하는데 이는 ‘쪽빛 해안’이란 뜻으로 칸느, 니스, 모나코,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지역이다)을 자아내고 그곳에 한가로이 떠있는 요트들이 아름답다.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연습할 수 있는 일인승 요트 옵티미스트급의 요트 두 팀이 레이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옛날 대천서중의 교사 시절 우리 학생들이 다 떨어져가는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돛을 달고 옵티미스트급 요트를 타고 연습하고 나는 그 옆에서 윈드서핑을 하던 옛 시절이 생각났다. 이곳 요트의 돛(마스트) 색깔이 바다와 너무 잘 어울린다.
 
◇ 남부유럽 선사연구의 중심지 라자레 유적 및 연구소

13시 30분, 라자레 연구소와 동굴 유적에 도착하였다. 이 라자레 동굴유적이 1967년에 발견되면서 발굴 유물의 보관과 연구에 필요한 사항을 추진하기 위하여 유적 바로 옆에 라자레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이곳은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 선사 연구의 중심지가 되는 연구소로 니스시가 후원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꾸밈없는 팔순의 노학자 룸리 박사를 만나 뵈었다.

▲ 니스 부시장에 축제홍보

첫 인상은 백발이 성성하고 이마가 많이 벗겨진 정말로 털털한 노인이요, 양복은 제대로 다려 지지도 않은 구겨진 헌 양복을 걸치신 꾸밈이 없는 모습이시다. 도대체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오로지 자기 일에만 성실하고 학문에만 몰두한 모습이 여실히 들어나는 느낌이었다.

그 분과 상견례를 하고 먼저 라자레 동굴의 안내를 받아 지금까지의 발굴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부터 우리는 구석기 발굴 방법과 특징을 좀 이해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1967년 발굴이 시작되어 45년이 지난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요, 우리의 일행으로 연세대학교 교수이신 한창균 박사도 수십 년 전 이곳에서 발굴에 참여하였단다.

아마 그분이 발굴한 지층은 지금보다 몇m 위쪽이었겠지? 이어서 연구소에서 맘모스 등의 대형 척추동물의 뼈를 관람하고 그 뼈들이 연대 측정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연결시켜 동물 복원을 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여러 질문도 하며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 수장고의 보물들

이 열정적인 노교수 ‘롬리 박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정말로 많은 설명을 하신다. 이러한 설명 도중, 모나코 공국이나 니스 의회 등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아마 구석기나 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고 룸리 박사의 후원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룸리 박사는 학문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지만 정치력도 뛰어난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 이지만 박사의 부인이 본인처럼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이며 프랑스의 대통령을 지낸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의 처제인 것이다. 즉 룸리 교수님과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과는 우리 촌수로는 동서 지간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가문이고 훌륭한 학자이시다. 설명이 끝나고 헤어질 때 한국의 세계구석기축제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정중히 초청의 말을 전하였고 무령왕관이 디자인된 타이슬리를 내가 직접 걸어 드렸다.

▲ 라자레동굴에서 룸리박사와 대화

3시 반, 니스를 떠나 모나코로 향하였다. 오른 쪽, 즉 남쪽의 지중해 푸른 바다위엔 하얀 낮달이 떠 있고 동쪽 이탈리아의 어디쯤에서 비가 왔는지 차창 앞에는 행운의 상징 무지개가 떠 있다.

우리는 서로의 덕이라고 칭찬하며 나폴레옹의 애기를 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의 어린 소년 시절 무지개를 잡으러 가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애기 등 무지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지중해변의 무지개를 마음껏 즐겼다.

◇ 구석기 연구를 적극 지원한 나라 모나코 공국

모나코는 프랑스로 둘러싸인 조그만 독립국. 옛날에는 모나코 왕국 그러다 요즈음에는 모나코 공국이라 한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깨끗하고 따뜻한 도시로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이다.

처음에는 이미지가 좋지 않은 도박의 도시로 시작되었지만 이곳의 주인들이 해양연구, 구석기 연구 등 많은 좋은 일들을 하여 이미지를 개선하였으며 날씨가 연중 온화하여 휴양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이곳의 주인인 레이니 3세와 결혼한 세계적인 미녀,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때문일 것이다. 이곳 모나코궁전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로 규모는 작고 외관도 단순하지만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 해양박물관 수족관의 물고기

궁전 내부는 르네쌍스 스타일의 프레스코화로 꾸민 천장과 안뜰이 있고 안뜰은 300만개의 하얀 조각돌로 치장되었는데 이곳에서 완벽한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그레이스 켈리’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나코의 대표적인 곳, 한 곳만을 보자고 하여 모나코 해양박물관을 향하였다. 1910년 알베르 1세가 창설한 대규모 박물관으로 초대형 돌고래 뼈, 초대형 오징어 박제가 전시되어 있고 배의 모형, 해양 생물의 표본, 해저 탐사 캡슐 등이 전시되었는데 다양한 희귀 바다 생물의 수족관도 볼 만하다.

대포로 무장된 옥상에 오르면 지중해변과 모나코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 세계의 요트 대회가 열리는 요트 선착장과 대규모 카지노인 그랑 카지노(Grand Casino)등이 보인다. 이곳은 누구 말로 “실업이 없는 곳”이라고 하니 “이곳 사람들 모두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저녁 6시 모나코 공국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하였다. 칠면조 요리와 아구 요리가 있어 아구 요리를 시켰는데 생선비린내가 좀 많이 났다. 9시에 귀가하여 12시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2시에 깼다.

다시 잠깐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새벽 5시 운동을 하러 거리로 나갔다. 어둑어둑한 새벽인데 카니발 광장은 축제 준비를 위한 물청소를 하고 있다.

◇ 로마문화의 노천박물관 시미에 역사지구와 샤갈미술관

2월 12일 6시 30분, 이른 아침을 먹고 구시가지와 해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호텔에서 해변으로 나가는 길은 구시가지 거리로 다양한 명품 상점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축제 준비를 위해 네온사인과 설치물들이 들어서 곧 축제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대형목욕탕 건물

해변 못미처에 있는 마세나 광장도 대형 관람석을 만들어 놓고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영국인의 산책로 3.5Km에는 새벽에 조깅하는 몇몇의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 니스에서는 미술관은 못가도 이곳 ‘영국인의 산책로’는 걸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행복하게도 어제, 오늘 이틀을 이 길을 걷고 또 달려본다. 물론 새벽이라 한낮의 따뜻한 태양 빛을 쪼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바로 해변으로 내려가면 자갈밭 해변인데 우리나라 밤톨만한 조약돌이 수Km를 뻗어 있어 이곳 니스는 조약돌 해변으로 유명한 곳이다.

8시 20분 식당에서 시미에 역사 지구로 출발하였다. 현재는 니스에서 제일 땅값이 비싸고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는 시미에 지구는 그리스의 속주도시로 출발해 B.C 14년에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식민도시가 된 곳이다.

A. D 4세기 후반에 로마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대형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등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그 로마 유적지에 ‘시미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어제 우리를 테라마타 박물관에서 안내한 루셀 박물관장이 또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였다. 이 분이 두개의 박물관장직을 겸임하기 때문이다.

우선 야외에 있는 대형목욕탕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고 공중목욕탕이 있는데 이천년 전에도 온탕, 열탕, 냉탕실 등 3개의 스파를 보유한 최고급 수준의 목욕시설로 조사되었단다. 또 목욕탕으로 통하는 길은 지금의 아스팔트 같은 고속도로로 돌로 잘 포장된 멋진 도로였다.

1960년에 설립된 이곳 시미에 고고학 박물관은 이 지역이 지중해의 상업도시 번성하던 시기의 여러 생활물품뿐 아니라 냉탕실에서 발굴된 1세기 시대의 안토니아 미노르 조각상과 석상 그리고 이정표, 조리기구, 도자기, 장신구, 묘비명 등 다양한 고고학 유물 1,200여점이 발굴, 소장, 전시되고 있다. 특히 장례 물품 등이 눈에 많이 띄었다.

친절하게도 박물관장 루셀은 우리를 수장고까지 안내하는데 그곳에서는 내가 세계사 책에서 본 듯한 붉은 바탕에 다양한 무늬를 입힌 그리스의 도자기를 보았는데 아마도 국보급에 해당할 것 같은 귀한 물건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박물관을 충분히 본 다음 나오는 길에 원형경기장을 둘러보았는데 원형 경기장의 형태가 그대로 많이 남아 있었다. 옛날 로마 시대, 맹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검투사들이 목숨 건 싸움 그리고 잔인한 로마인들의 미친듯한 함성이 들려 올 것만 같은데, 이곳에서 요즈음에는 매년 7월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 수많은 관광객과 니스 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트린다고 한다. 그래도 “옛날의 피를 보고 흥분하는 관중 보다는 수준이 나아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 로마 유적지 원형경기장

바로 옆에는 올리브 농장이 있고 그 농장 안쪽으로 3층짜리 붉은 색 벽돌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유명한 마티스 박물관이다.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회화, 판화, 조각 등 총 522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면서 원색의 조화를 이루는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마티스는 찬란한 태양과 푸른 바다의 니스에 반해 1917년부터 1954년 임종할 때 까지 줄곧 니스에서 살았다(원래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의 북부 르 카토라는 지역에서 탄생하고 그곳에서 생활하였음).

그리고 니스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니스는 나 자신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41년 암 선고에 류마티스염, 심장병까지 도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1948년 이후 색종이로 형태를 만들어 붙이는 새로운 기법까지 고안하며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지중해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푸른색에서 찾고자 했던 그는 어느 화가보다도 푸른색을 잘 활용하였으며 그의 말년의 색종이 작품 “푸른 누드”는 여든 살 거장의 예술 혼이 묻어있는 명작이다. 

▲ 마티스 미술관

안타깝게도 시간이 부족하여 이곳 마티스 미술관에서 미술관 전경 사진만을 찍고 그 유명한 샤갈 박물관을 찾았다. 정식 명칭은 샤갈 국립 미술관(Muse'e National Marc Chagall)이며 또 다른 말로 ‘마르크 샤갈 성서 미술관’ 이라고도 한다.

니스 인근의 '방스'라는 도시의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을 시작한 성서 시리즈 편이 1960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샤갈의  성서 작품이 성당에 걸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성당 측으로부터 거절을 당했고 그의 작품을 알아 본 그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가 미술관을 제안하고 샤갈의 노력에 의해 1973년에 미술관이 건립되어 샤갈의 작품만 전시하고 있다.

소장품은 약 450점이고 주로 샤갈의 후기 작품으로 종교 관련 작품이 대부분이다.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세계대전을 겪기도 한 그는 이때의 서러움과 전쟁을 목격한 충격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였고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서커스도 샤갈 그림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웃음을 주기 위해 공연을 하지만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서커스 단원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으려고 했었다.

한편 샤갈은 1915년 결혼한 아내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과 사랑을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면서 사랑이라는 테마를 주변에 많이 전파하려고 했다. “우리네 인생에서 삶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깔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는 그의 말은 그의 예술 작품과 더불어 아주 유명한 말이다.

▲ 검은 배경의 서커스

이 미술관은 샤갈이 건축에 직접 참가해 자신의 작품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구석구석을 직접 꾸민 곳이다. 메인 전시실에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성경의 아가서의 영감을 받아 그린 연작 등이 전시되어 있고 다른 전시실에는 스케치와 판화 등이 전시되고 콘서트  홀에는 샤갈이 그림을 그려 넣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직접 만든 세 개의 스테인그라스에서는 몽환적인 푸른빛이 가득하다.

이곳은 샤갈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 중년의 신사가 아주머니들에게 샤갈의 그림을 해설해 주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해설이 수준급이다. 성경의 내용과 그림의 특징을 잘 설명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의 교회에서 방문한 여성 신도들이고 해설가는 목사님이라 한다.

목사님이 미술적 안목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1시간 이상을 보다가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시장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과 차 한 잔을 마셨는데 자그만 정원이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 샤갈의 작품 앞에서

 

◇ 페니키아 시대부터 만들어진 요새, 독수리 둥지 마을 에즈

독수리 둥지(에즈 -Eze)마을, 바닷가 가장 높은 언덕(470m)의 고립된 정상에 성벽을 둘러 적의 침입을 막았던 요새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멋진 곳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기원전 3세기 지중해를 지배했던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지어졌으며 에즈(EZe)라는 이름은 이집트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신 오지리스와 그의 아내 이지스(Isis)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마치 절벽 꼭대기에 있는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독수리 둥지처럼 생겼다하여 독수리 둥지 마을이라 한다.

▲ 샤갈미술관과 한국관광객

중세에도 도시인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몰려들어 더욱 마을이 번성했고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해 더 견고한 성이 만들어졌다. 중세 이후의 흔적들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새하얀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길과 돌로 지은 집들의 사이를 걷는 것이 마치 기분 좋은 미로를 걸어 다니는 느낌이다.

곳곳의 집들은 기념품점, 수공예품 상점, 갤러리, 호텔, 레스토랑 등으로 변신하여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인구 약 9천명의 이곳 주민들이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한다. 원래 위치상 가까운 모나코 영토였으나 1860년 마을 사람들의 투표에 의하여 프랑스로 귀속되었다고 한다.

이곳 에즈는 향수로도 유명한데 프라고나(Fragonard)라는 향수 상표의 본 고장이요 Fragonard Musee(향수 박물관)가 있어 향수의 역사와 삼천 개가 넘는 향수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 제조과정, 향수 전시장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에즈의 좁은 산책길.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의 숲길에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그의 대표작<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 니체가 걷고 명상하던 길을 ‘니체의 길’이라 부른다.

이 에즈의 맨 정상에 자리 잡은 야생의 정원(Jardin d'Eze)은 일 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온통 초록색식물로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한 2월은 그중 추운 겨울이기에 선인장과 희귀식물들이 동파되지 않도록 짚으로 쌓아놓음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상에 세워진 멋진 조각상과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펼쳐지는 코트 다쥐르(Cote D'Azur)의 쪽빛 바다가 잘 어울린 숨 막히는 절경을 연출하고 있어 보는 나로 하여금 연신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 에즈 정상에서 바라본 푸른 지중해

점심은 송아지 요리와 맥주 한 잔을 걸치고 차에 올라 13시 30분 에즈를 출발하였다. 고속도로 번호 A8번 고속도로를 타고 우리는 서쪽 스페인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흰 눈 쌓인 알프스 서쪽 끝자락의 고봉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지중해의 쪽 빛 물결이 넘실댄다.

휴양도시 칸느를 왼쪽으로 멀리하고 통과하였으며 칸느를 지나 멀리 대형 아파트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성냥 곽 같은 멋없는 아파트가 아니라 넓게 자리를 잡아 옥상에는 키 큰 열대나무들을 심었다. 이 나무들과 집들이 어울리어 극히 자연스러운 풍광을 연출하는데 우리도 이렇게 자연과 조화된 아파트를 언제쯤 지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차는 서쪽으로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 쪽으로 계속 달린다. 몇 시간을 지난 후에 고속도로의 오른쪽에 ‘아비뇽’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중세의 교황권이 축소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로마 교황이 아비뇽으로 유폐되는 ‘아비뇽유수’라는 사건과 관련된 유명한 도시이다.

얼마 가서 론 강 하류의 삼각주, 많은 물줄기가 보이고 사이프러스 나무와 끝없는 녹색 평원을 차는 계속 달리고 있다. 차는 계속 지중해를 끼고 서쪽으로 달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인 페르페낭을 지나 북서쪽 33Km 위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 또따벨에 20시 30분 경 도착하였다.

에즈를 출발한 것이 13시 30분이었으니 장장 9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이곳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에 있는 남프랑스의 오지이다. 인구 겨우 950명의 조그만 도시로 구석기 유적 또따벨과 포도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또따벨 와인 두 가지로 먹고사는 곳이다.

◇ 45만 년 전의 두개골을 예술과 관광으로 승화시킨 또따벨 마을
 
2월 13일 아침 6시 기상, 잠깐 운동을 하기위해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호텔(Abri Sousroche - 말로는 호텔이지만 10여명이 묵으면 꽉 차는 우리나라의 민박과 같은 형태의 숙소)을 나와 20분쯤 마을을 반 바퀴 쯤 돌자 벌써 마을이 끝나는 표시가 나온다. 정말로 조그만 마을이다.

▲ 또따벨 마을 중심지

50분 정도 운동을 하니 날이 훤히 밝았고 이해준 원장님과 시장님도 산책을 나왔다. 컴컴할 때 다닌 마을을 시장님과 다시 둘러보며 같이 사진을 찍으며 다니는데 교회에서는 15분마다 종소리를 울린다.

마을의 중심지에 우체국과 동사무소 공동 회의소(우리나라 시민회관 종류) 등 여러 공공기관이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다양하고 특색있게 지어졌으며 마을 곳곳에 예쁘게 디자인한 예술품 들이 있어 과연 예술의 나라 프랑스답구나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하나의 ‘해골’을 예술로 승화시킨 마을 또따벨. 이곳저곳의 구석기관련 상징 조형물, 예술 작품 등이 잘 어울리어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겨우 인구 950명의 작은 마을에 비해 마을의 공공 회관이 너무 크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공공 회관은 구석기 관련 홍보관이며 또 문화센터(Palais des Congres)이며 마을 회관을 겸하는 것으로 나중에 안 것이지만 룸리 박사의 노력으로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란다. 우리 공주의 문화재 관련 시설의 설립 및 관리에 시사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민박집에서 남자 주인이 차려주는 간단한 아침 식사(빵, 우유, 버터, 요구르트 정도)를 하고 또따벨 박물관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1964년부터 시작된 아라고 동굴 유적(Caune de I'Arago)의 발굴로 인해 설립된 박물관이다.

▲ 문화센터를 관람하는 일행

‘아라고 동굴’에서 발굴된 자료를 전시하고 과학적 연구 성과를 보여주기 위하여 1992년 건립하였다. 그 옆에 또따벨 유럽선사문화연구센터가 만들어진 후 두 기관이 유기적인 연대를 이루어  발굴자료 전시- 연구 및 성과 보고 - 과학지식의 전파 등으로 선순환 체계가 만들어져 유럽 선사문화연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곳에서 롬리 교수의 제자이신 한창균 박사와 연세대의 공수진박사와 나, 셋이서 먼저 박물관을 방문하여 롬리 교수에 인사를 드린 후 그 분을 모시고 아라고 유적으로 향하였다. 여기에서 룸리 박사에 대해 또 하나 감동받은 것이 있다.

엊그제 내가 선물한 타이슬리를 허름한 티셔츠 위에 걸치고 나오신 것이다. 즉 선물을 준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그 선물을 갖추고 나온 것이다. 정말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인품이 훌륭한 분이다” 하는 생각을 하였고 선물을 준 나도 비록 하잘것없는 작은 선물이지만 상대방이 소중하게 생각해주니 마음이 흐뭇하였다.

‘아라고 동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대 피레네산맥의 카르스트 지형의 동굴 유적으로  현재의 강에서 약 80m의 높이에 위치하고 폭은 약 15m 깊이는 약 30m 정도 되는 동굴이었다. 한쪽에는 70만 년 전에 형성되어 자라는 석회암 동굴의 석순이 있었다.

이 동굴에 민델빙하기(약 40~55만 년 전)무렵부터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퇴적층이 11m의 두께에 걸쳐있으며 그 퇴적층에 겹겹이 짐승과 사람의 뼈, 석기, 꽃가루 등 다양하고 막대한 문화유물과 자연유물이 나오고 있어 40년이 되는 지금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오신 한창균, 조태섭, 공수진 박사님들도 수십 년 전 이곳에다 천막을 치고 발굴에 참여했다고 하며 룸리 박사님이 이 세분들과의 정겨운 추억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정말로 몇 십 년 이어진 사제 간의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모습들이었다.  

▲ 또따벨 박물관 입구

이곳에서 나온 석기의 대부분은 석영조각을 이용한 거친 것으로 양면 석기, 찌르개, 긁개 등이 대표적인 석기이다. 그러나 이런 석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화석 인골이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뼈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이곳 11단계 층에서 1971년에 출토된 인골 I'Arago ⅩⅩⅠ(이곳 마을 이름을 따서 일명 또따벨인이라 함)은 약 45만 년 전의 두개골로 유럽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눈구멍의 위에 발달된 융기부(이마 뼈)는 구인(舊人類)을 능가하지만 두개골 용량이 115ml로 원인과 구인의 중간치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인류의 인골은 대부분 어린이나 젊은이들의 것이 많다고 한다.

14단계에서 출토된 짐승의 뼈는 약 5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17층의 꽃가루 등을 통해 그 당시에는 따뜻한 기후의 식물이 자란 것도 알 수 있단다. 이렇듯 이 지층의 각종 동, 식물의 시료를 통해 지구의 고환경과 생태 변화를 추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60만 년 전부터 ‘유럽형 곧선사람’이 있었고 짐승의 뼈들로 보아 사냥꾼으로 활동한 흔적을 알 수 있으며 40만년 이후부터 불을 사용했을 것으로  10만 년 전부터는 장례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아라고 동굴 입구

약 4~5만 년 전의 현생 인류의 탄생 이후엔 장신구와 음악, 예술 등도 점차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동굴의 퇴적층은 인간의 흔적과 환경의 변화를 기록한 하드 디스크이다. 룸리 박사가 늘 말씀하시는 마지막 주장은 한국도 구석기 연구가 활성화되려면 구석기 연구의 하드 디스크인 동굴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80의 노학자의 열정이 보통이 아니신데 이분이 지금 이러한 열정을 가졌는데 3~40대의 젊은 시절의 열정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해 보았고 그 밑에 제자들이 이런 훌륭한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연구하였기에 프랑스의 구석기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여하튼 이 노교수님의 건강도 걱정이지만 이 열정적 강의를 모두 통역해서 전달하여야 할 우리 공수진 박사님의 건강도 무척 걱정이 된다.

첫날부터 우리 여행의 전 과정을 안내하고 또 수 시간 동안 꼼짝없이 강의하는 노교수님의 프랑스어 통역을 하는 어려움을 지금까지 며칠 째 겪고 있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고맙고 공적으로는 너무 많은 일을 맡겨 미안하기도 하였다. 

▲ 또따벨인 발굴지점

또따벨 박물관, 전시실 규모는 약 453평. 총 22개의 전시실. 연 관람객 약 7만명(이중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인원이 1만 5천명) 우리 석장리 박물관도 단순히 관람객의 유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석기 문화를 체험하고 인류문화의 발생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1,2박으로 운영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다.

박물관의 다양한 연구실을 방문하였다. 토양분석, 꽃가루 등 미세 분석, 화학, 방사선 분석실 등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고 환경을 추정하고 있었다. 석기실은 100여종 이상 되는 다양한 돌감(석영, 규암, 사암, 석회석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돌감, 또는 돌의 질은 그 시대인 들의 활동 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원시생활을 복원한 전시실에서 나온 음향이 자연의 소리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았다. 저작권에 큰 문제가 없으면 우리에게도 음향을 보내주길 부탁하여 나중에 받아 두었는데 세계 구석기 축제에 잘 활용해볼 계획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이곳이 원산지인 유명한 또따벨 포도주를 사기위해 포도주 매장을 찾았는데 문은 닫혀있고 점원도 없는 것이다. 알고 보니 점심시간이다. 2시까지 기다려도 사람이 아니 온다.

그냥 갈려는 2시 10분경에 느긋하게 주인인지 점원인지 하는  뚱뚱한 사람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은 기다리기 진이 빠져 차에 올라있고 나를 비롯한 몇 사람만 또따벨 와인을 1~2병씩 구입하였다.

▲ 거위동상과 구 건물

 

◇ 폐허 직전에서 관광 명소로 탈바꿈한 마을 샤를라

이제 우리는 또따벨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한다. 남쪽은 지중해, 서쪽은 피레네 산맥, 15시 40분 경 부터 달리는 차가 요동 칠 정도로 바람이 엄청 심하다. 16:30분 빗속에서 휴게소를 들러 정해진 시간 45분인가를 쉬었다가 출발하였다. 이곳 관광버스의 기사들은 운행 시간과 휴식 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예를 들면 200Km 운행했으면 20분, 400Km 운행 했으면 50분 등으로 운행 거리에 따른 휴식 시간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버스 내에 블랙박스가 있어 철저히 기록된다고 하며 안 지킬 경우 벌금 등 제재가 엄청나다고 한다.

기사 본인과 승객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 같고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도입하여야 할 것 같다. 갈수록 빗줄기가 커지면서 17:30분 톨루즈를 통과한 후 어둑어둑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짐정리를 하고 저녁 식사에는 푸아그라((foie gras)라는 거위 간 요리를 맛보았다.

▲ 레제지의 우리 일행

이곳은 거위 간 요리가 유명하고 거위축제가 열리는데 내일 모래부터가 축제일이라고 한다. 푸아그라는 세계 3대 요리 중 하나에 포함되는 유명한 요리로 각종 행사나 잔치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요리이다. 오리나 거위의 노란 간을 그냥 먹기도 하고 빵에 발라 먹기도 하는데 약간 비린듯한 냄새가 나서 내 식성에는 그리 맞지 않았다.

여하튼 먹기는 하였는데 이 간을 생산하는 과정을 듣고서는 정나미가 떨어져 다음부터는 푸아그라를 절대 주문하지 않았다(푸아그라를 생산하기 위해 거위 간을 붓게 하는데 그러기 위해 옥수수가루를 먹여 간을 강제적으로 비대하게 하고 심지어는 거위를 붙들어 매고 강제적으로 호스를 입에 넣어 물을 투입한단다.

그래서 간을 크게 만든 후 거위를 도살해서 푸아그라를 얻기 때문에 유럽의 동물애호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단다. 거위의 간이 푸아그라의 정품이고 오리의 간은 짝퉁이라 함).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시내를 한 바퀴 도는데 도심에 있는 한 오래된 건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1530년에 만들어진 건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이곳 샤를라(Sarlat La  Kaneda)는 중세풍의 냄새가 물씬 나는 오래된 도시이다. 이 마을의 시작은 1153년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337년부터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100년 전쟁 기간 중에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 프랑스의 병참 기지이기도 한 중요한 도시였다.

▲ 크로마뇽 암거지

그 이후에도 번성하여 16~17세기에 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는데 20세기 들어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부터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단다. 이 폐허가 되어 가는 곳을 당시 문화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문화재복원사업의 시범마을로 지정하여 중세의 모습을 잘 복원해 놓았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으며 프랑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나는 세계사를 공부하며 늘 느낀 것이지만 한 사람의 마인드가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늘 하였는데 그런 사람 중의 한 분이 바로 프랑스의 문화 장관이었던 ‘앙드로 말로’이다.

그의 마인드에 의해 폐허가 될 도시가 관광도시로 활성화 되었고 그야말로 폐기 처분 직전의 샤갈의 그림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고 프랑스 문화의 품격을 올린 것이다. 또 하나 우연히 길 가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보았는데 이 작은 도서관을 통해 책을 서로 나누어보고 공공 물건을 아끼는 이 도시의 수준과 품격을 느껴볼 수 있었다.

◇ 세계 구석기의 수도 레제지와 프랑스 선사 박물관

2월 14일 6시 기상. 호텔(La Couleuvrine)은 별 2개 급으로 외모는 멋진데 내부는 낡고 비좁으며 삐꺼덕거리는 소리가 유난하였다. 또 하나는 방음이 안 되는 수백 년 전 건물이라 옆방의 소리가 너무 잘 들려 불편하였다. 아침 운동을 나갔다.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역시 30분도 안 걸리는 것 같다. 이곳도 아주 조그만 소도시이다.

7시 30분 일찍 밥을 먹고 30분간 마을 곳곳을 촬영하고 9시 경 ‘구석기의 수도’ 레제지 드 따이약(이하 레제지로 부르겠음)으로 향하였다. ‘레제지’는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州 도르도뉴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 프랑스 선사박물관

옛날 이곳 베제르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고 드넓은 평원이 있어 동물들이 지천이었을 것이다. 수백 억 년 용식된 석회암 암거지는 집을 짓지 않아도 비와 눈, 바람을 피하는 최적의 주거 환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수 만 년 전에 인류가 이곳에 머무르게 되고 그 쾌적한 환경에 살면서 여유가 있으니 많은 동굴에 재미있고 의미 있는 많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곳 레제지 마을에서 1868년 3월 철로 공사 중에 인간의 뼈가 발견되었다. 남성 3, 여성1, 어린아이 1구의 유골과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해부학적으로 보아 현대 유럽인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흡사하며 건장한 체격에 머리가 큰 특징이 있었다.

이들은 그들이 발견된 장소(암거지)의 이름 크로마뇽(거대한 구멍이란 뜻)을 따 크로마뇽인(Cro-Magnon)이라 부른다. 인류의 진화 단계 중 호모 사피엔스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추정되며 역사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류이다.

크로마뇽인은 연중 대부분을 다양한 사냥감을 먹고 식료를 저장하였으며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동굴이나 바위가 돌출해서 만들어진 암거지(실제는 석회암이 용식되어 안쪽으로 패인 바위 그늘) 등에서 거주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구석기인들보다 도구를 다양화, 전문화시켰으며 특히 정밀한 석기와 골각기 등을 이용해 상당 수준의 벽화를 표현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주로 동물이었다. 인간의 두뇌크기가 발달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들이 있었을까? 왜 그들은 그 깊고 어둑한 동굴의 안쪽에 고고학적인 기록을 남겼을까? 이런 미술품은 그들이 표현하고자하는 정확한 의도를 잡기는 어렵다.

▲ 인류의 발자욱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렵채집사회의 특성상 그 동물들이 많이 잡히기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아니었을까  추측(대부분 동굴 깊은 곳에 그림이 있는데 불을 밝혀 보았을 때 실물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보임)된다.

이어서 찾은 곳은 프랑스 선사 박물관, 구석기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랑스 구석기의 대표 박물관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제르 계곡의 중심지에 위치했고 인류화석, 동물 뼈, 석기, 연모, 매장 유구들이 전시되어 잇는 곳이다.

원래는 퐁드 곰 유적을 발견한 페이로니의 노력에 의해 암거지를 이용해 만든 프랑스의 성채(Chateau de Tayac)를 개조하여 선사 유물을 수집하고 공개한 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2004년 기존 건물 옆쪽에 건물을 확장하고 전시 공간을 크게 정비하여 박물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박물관은 700m² 전시면적을 가지고 있고 소장품은 무려 6~700만점이 된다. 박물관장 클레예 메를르는 수염도 깍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얼굴로 꼭 구석기 시대의 네안데르탈인 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인사와 더불어 정열적인 여자 해설사 소피가 우리를 인도하며 박물관을 소개하는데 1시간 반 동안의 그의 열정적인 해설은 거의 몸을 던져가며 최선을 다하는 멋진 해설이었다.

먼저 박물관의 입구는 인류의 발자국으로부터 시작된다. 350만 년 전 인간의 발자국이 화산재로 덥혀 지금까지 보존되다 발굴된 탄자니아 유적을 동판에 새겨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 놓았다. 직립, 즉 서서 걸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다.

▲ 석기의 변천이 잘 설명됨

이어 나타나는 350만 년 전의 최고의 인류(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 칭하는 ‘루시’의 모습과 네안데르탈인의 생활 모습 등을 복원하여 놓았다.

또 나타나는 것은 250만 년 전의 아프리카 최초의 석기, 180만 년 전 미코키안 문화층에서 나온 양면 석기, 좌우 대칭이 잘 이루어진 아슐리안 주먹도끼에서 후기 크로마뇽인들의 석기까지 석기의 제작과 활용이 시대적으로 잘 연결된 전시 공간이었다. 그 전시관에서 얼마나 열심히 우리 해설사가 설명을 하는지 우리는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층은 구석기인의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8만 년 전의 장신구(사슴, 곰, 동굴 사자의 이빨 등) 3만여년 전의 상아 구슬 그리고 후기 구석기의 예술품인 순록의 뿔로 만든 ‘고개를 돌린 소’의 작품이 있는데 이는 프랑스 구석기 예술전시회의 표지 모델로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 밖에 여성의 성기를 표현한 ‘Sexual symboles’ 등도 볼 수 있었다.

국립선사박물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 선사문화 국제센터(약칭- PIP 센터)인데 이곳은 2010년 문을 열은 문화협력 공공기관으로 프랑스 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유럽연합(EU)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3,000m² 면적의 PIP 센터는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건물로 지상 1층에는 지역의 선사유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베제르 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많은 인쇄물과 디지털 자료가 있었고 지하에는 어린이와 학생들이 다양한 선사체험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있었는데 그 교육 방법이 아주 다양하고 특이하여 많은 학습 자료를 얻어왔다.

▲ 퐁드곰 동굴의 들소 그림

한마디로 이곳은 유적과 관광산업의 활성화 그리고 교육을 하는 문화공간이다. 이곳의 센터장과 교육 담당이 우리를 구석구석 안내하였다. 첨단 미디어를 활용하여 구석기 교육을 하는 것과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미와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준원 시장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아브리 빠토(Abri Pataud) 유적. 이곳 역시 바위 그늘(암거지)유적으로 1958년부터 1964년에 걸쳐 미국 하버드 대학의 모비우스(H. L. Movius Jr) 교수팀이 발굴한 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프랑스에는 전기, 중기, 후기 구석기 문화가 있는데 지금부터 70~20만 년 전의 전기구석기를 아슈리앙, 20만년전에서 4만 년 전의 중기구석기를 무스테리앙, 4만년 이후를 오리나시앙, 아질리앙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곳 아브리 빠토 유적은 후기 구석기 유적의 약 3만 5천 년 전에서 2만 년 전의 유적으로 밝혀졌으며 14개 층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나온 유적이 43만점에 이른다.

특히 이곳에서는 순록이 1만년 이상의 기간 동안 전체 사냥감의 30% 가량을 차지했음이 밝혀졌는데 그 당시의 구석기인들은 순록의 통로를 잘 알았고 그 당시 기후도 빙기에 해당하지 아니 하였는가 추측되며 이와 같은 많은 유적들은 바로 옆에 박물관을 건립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은 생각 보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박물관이었는데 박물관 한 가운데 이곳에서 출토된 여인의 인골을 연구, 분석하여 복원하여 놓았는데 이 구석기 여인을 구석기 학자들은 ‘마담 빠토’라 칭한다.

 그 옛날 수 만 년 전의 구석기 여인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이 순간, 수 만년의 시공을 넘어 구석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만 년의 시간과 수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 넘어 상상하고 생활하는 내가 너무도 대단하고 행복하다.

◇ 세계적인 동굴벽화 퐁드곰과 라스코 동굴

퐁드곰 유적(Font-de-Gaume)은 1901년 선사학자 브뢰이유와 페이로니에 의해 발견된 총길이 124m의 동굴로 후기 구석기유적이다. 그림은 동굴 깊숙이 있는데 동굴 내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불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돌을 깎아 낸 그릇 같은 곳(돌 등잔)에 심지를 이용하여 동물의 기름을 태웠을 것이다. 대부분 들짐승들을 그렸으며 동물의 몸 전체는 자토(Red Ocher)로 색칠되어 있는데 유명한 화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물에 녹지 않으며 유기물질이 전혀 없는 갈아낸 바위가루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퐁드곰 동굴 입구에서의 우리 일행

검은 분말은 주로 산화망간이고 자토는 산화 제2철이란다. 분말을 칠하기 위하여 고착용 기름이 첨가됐을 가능성이 크다. 벽화에 그려진 동물의 수는 약 300여 마리에 달하는데 들소가 제일 많고 야생마, 매머드 등이다. 우리는 그중의 대표적인 들소 그림 등을 세 군데에서 보았다.

퐁드 곰에서 라스코 유적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라스코 동굴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비수기에 동굴을 개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동굴의 입구까지 만이라도 가보자고 내가 부득부득 우겨 라스코 동굴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하늘이 우리를 축복하듯이 저녁노을과 멋진 채운(彩雲)으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정말 이곳에 와서 우리는 최고의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라스코 동굴은 2개이다. 원래의 라스코 동굴과 ‘라스코 Ⅱ’로 라스코 동굴을 똑같이 만든 모조 동굴이다.

원래의 라스코 동굴은 구석기 연구학자 등 특별한 경우에만 일 년에 몇 차례 개방될 뿐 완전히 폐쇄되어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처음에 휘황찬란하던 1만 7천 년 전의 구석기인들의 벽화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됨으로 급속하게 퇴색되어가는 것에 대한 궁여지책이다.

▲ 동물이 살아 움직일듯한 라스코 동굴벽화

1963년 라스코 동굴을 폐쇄하고 1983년부터 원래의 동굴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복제 동굴을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조 동굴도 동절기에는 열지 않는 것이다. 또 하절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프랑스 정부에서는 제3의 라스코 동굴을 계획하고 있단다. 

하절기 사람들이 바글대는 동굴의 입구는 지금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먼저 ‘원조 라스코 동굴’ 입구는 동굴입구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동굴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없었고 다만 수십 년 전 이곳을 찾은 조태섭 박사님의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철조망 안으로 이곳을 통제하고 지키기 위한 건물이 하나 있는 것이 아마도 이곳이 동굴의 입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식일 것이다.

‘복제 라스코 Ⅱ’ 입구는 모든 시설은 그대로 있는데 3개월 여간 폐쇄하고 방치하여 각종시설과 도색이 퇴색하여 볼품이 없으며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저녁의 어스름한 분위기와 어울리어 더욱 황량하다. 이곳을 들어가지 못하지만 화보와 설명으로만 그 유명한 ‘라스코 동굴’을 들여다보자.

이곳 베제르 계곡에는 147개의 유적지와 25개의 동굴이 있는데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이 이곳 몽티냐크(Montignac)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Lascaux)동굴이다.

1940년 9월 어느 날 이 마을의 개구쟁이 소년 마르셀을 비롯한 네 친구들은 근처의 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라는 소문이 있는 풀 섶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리고 60cm 정도의 좁은 구멍을 찾아 구멍을 넓힌 후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기를 10m, 그리고 꽤 넓은 동굴이 나왔다. 마르셀이 가져간 램프에 불을 붙이자 바라보이는 천장은 꽤 높았고, 기괴한 돌고드름이 천장에 매달리고 어느 것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앗, 말 좀 보아” 한 소년이 소리쳤고 “어 소랑 사슴도 있네” 정말 네 소년의 앞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달리고 있었다. 어떤 말은 앞발을 치켜들고 히힝 울고 있고 들소는 금방이라도 소년들을 덮쳐 들 기세였다. 100여 m 정도의 동굴 벽은 짐승의 그림으로 꽉 차 있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그 당시 최고의 고고학자 브뢰유가 달려왔고 그가 꼼꼼히 조사한 결과 800점이 넘는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곳 동굴은 주 동굴과 서너 갈래의 부수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는 들소, 야생마, 사슴, 염소 등이 주로 그려져 있으며 고양이나 주술사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짐승들의 크기는 대체로 커서 주 동굴에 있는 검은 소는 가로가 5m가 넘었다.

그림은 빨강, 검정, 노랑, 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았지만 홈을 판 선각화(線刻畵)도 꽤 있다. 그림 중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겹친 것도 있는데 이렇게 많은 짐승을 한꺼번에 그린 것은 그 짐승들을 손쉽게 그리고 많이 잡히도록 기원한 주술적 행위가 아니었나? 한다.

▲ 로셀의 비너스상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이어 라스코 동굴을 비롯한 많은 동굴들이 발견되자 동굴이야 말로 마지막 빙하기(약 만 년 전)에 인류의 조상들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임이 명백해졌다.

이 라스코 동굴은 1948년 7월 14일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에 맞추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는데 체계적인 연구나 보존대책 없이 인기에 영합하여 개방을 하다가 급속히 퇴색되는 동굴의 그림을 보며 “아차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듦으로서 15년 만에 공개를 중지하였다. 문화유산에 대한 섣부른 포퓰리즘이 인류의 소중한 유산을 얼마나 쉽게 망가트리는가를 보여준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곳 라스코 동굴과 아까 다녀 온 퐁드곰 유적, 그리고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들은 약 2만여년 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버텨 왔을까? 그 수수께끼의 답은 석회질 막이다. 석회암 지역에서 몇 천 년에 걸쳐 생성된 엷은 석회질 막이 동굴의 그림을 잘 보전해 준 것이다.

또 하나 베제르 계곡 근처의 로셀에서는 ‘로셀의 비너스’라는 다산을 상징하는 나체 여인상이 출토되었는데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 ‘로셀의 비너스’의 풍만한 가슴과 허리, 강조된 음부는 구석기 시대에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 예술품으로 우리 석장리 박물관에서도 그 복제품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6시 30분 경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이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이다. 어제 호텔 지배인이 말하기를 “내일 저녁은 식사를 하려면 미리 예약을 하십시요”라고 말했다기에 발렌타인데이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해서 7시에 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식당은 한산하였다.

오늘의 특별 요리는 푸아그라란다. 오늘을 위해 “애꿎은 거위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가겠네” 하는 생각을 얼핏 하였다. 그런데 주인 말대로 8시가 가까워지지 쌍쌍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식당을 가득 메운다.

이곳의 발렌타인데이는 우리나라 청소년의 행사처럼 그렇게 젊은 아이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인 남녀들이 자연스럽게 식사하고, 부부가 모처럼 나와 외식하는 그런 조용한 날인 것 같다. 식사 후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우리나라처럼 요란한 청소년들의 탈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둘과 여학생 하나가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4~5층 되는 건물 위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학생들이 노는 소리와 음악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요란하지 않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우리의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된 것 같다.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름달이 서녘에 걸려있고 동그랗고 예쁜 달무리가 나타난다. 니스의 무지개, 라자레 계곡의 붉은 구름, 샤를라의 달무리, 그리고 온화한 날씨. 우리는 엄청난 날씨 호강을 하며 다닌다. 날씨에 대한 복이 많은 이준원 시장님 덕 그리고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복덩이라 그렇다고 모두를 추켜세워 주었다.

저녁 만찬은 와인을 한 잔 하였다. 프랑스에서 병에 든 와인을 주문하면 웨이터가 손님이 있는 곳에서 직접 병을 딴 후에 대표되는 한 사람에게 맛을 보게 한다. 이 때 대표되는 사람은 와인의 맛, 향, 색깔 등을 감상하고 좋다고 생각되면 쎄봉(C'est bon)하고 말해주는데 이 런 허락을 받은 후 전체의 손님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것이다. 이것을 와인 테이스팅(시음-프랑스 말로 데귀스타 시옹)이라 한다.

이때 공수진 박사가 시음을 하는 시장님께 “시음하는 사람이 식사 값을 다 내야하는 거 아시죠”하고 농담을 하자 시장님도 재치 있게 “물론입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쏠께요”하고 잘 받아준다. 이렇게 중세 도시에서의 하룻밤도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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