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일 오후,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종촌)에서 <초려역사공원> 상량식이 거행된다.

초려 이유태 선생(1607-1684)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곳이다. 세종시 건설이라는 국책사업을 계기로 귀중한 역사유적을 제대로 현양하게 된 것을 축하해 마지않는다.

그런데 왠지 서운하다. 우리 공주의 위인을 뺏기는 것 같다고 할까? ‘초려는 공주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2012년 7월, 세종시 출범 때에 장기면을 ‘장군면’으로 개칭했을 때도 그랬다.

절재 김종서(1383-1453)의 생가지는 공주시(의당면 월곡리)에, 묘소는 세종시(옛 장기면 대교리)에 있지만, 세종시에서 아예 ‘장군’면으로 짓자 상징성이 그쪽으로 넘어간 듯한 기분.

초려 이유태 선생이 어떤 분인가? 조선 유학사에서 ‘충청 5현’(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와 함께)으로 불리는,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이다.

율곡사상을 이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본디 금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57세 되던 해부터 공주 상왕동(중동골)에 자리잡았다(현재 공주에 대대로 이어 사는 경주이씨의 효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기호유교’라고 불리는 호서학파의 활동이 논산, 회덕 등과 함께 충청도의 수부(首府)였던 공주에서 펼쳐진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이 아닌가 싶다.

초려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60회나 등장한다. 율곡과 사계의 학통과 정치노선을 이어, 4만여 자에 이르는 <기해봉사(己亥封事)>라는 국정 쇄신책을 임금에게 건의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상소문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내용은 대단히 개혁적이고 국정의 전 부문을 망라했다.

한마디로 조선 중기의 개혁정책을 주도한, 공주의 대표적인 역사인물이다. 한데 우리가 제대로 선양하지 못함으로써 장차 세상사람들이 ‘초려는 세종시의 역사위인’으로 알지 않을까.

공주에 선생의 유물유적이 없냐면, 많이 있다. 선생이 처음 터를 잡은 중동골 용문서원에 가문의 자취와 유물들이 전하고, 공주대학교 박물관에는 초려 선생이 사용했거나 묘에서 나온 호패, 인장, 옥관자, 문필구, 백자항아리 등의 귀중한 유물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뿐, 제대로 그 생애와 업적을 기리지도, 오늘에 되살리거나 교재로 활용하지도 못함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우리 공주가 풍부한 역사문화유산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례는 또 있다. 바로 홍길동이다. 허균이 봉건시대를 풍자, 비판하여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공주를 근거로 활빈당 활동을 한 실재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공주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외지 사람들이 알 리가 만무하다.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 충청도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활동했다는 기록과 함께, 연산군 5년(1500년)에 의금부에서 체포해 처형했다고 적고 있다.

사곡, 우성, 정안면에 걸쳐 있는 무성산(614m)에는 홍길동과 그 누이가 함께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무성산 정상 주변에는 성곽(‘홍길동성’)의 흔적과 여러 개의 돌탑들이 남아 있으며, ‘홍길동굴’도 볼 수 있다.

그럼 허균은 어떻게 <홍길동전>을 짓게 되었을까? 그가 공주목사로 1607, 8년에 재임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그는 홍길동 이야기를 수집, 소설의 중요한 뼈대로 삼은 듯하다. ‘칠서의 옥‘(광해군 5년, 7명의 양반가 서자들이 연루된 역모사건) 관련자들인 서양갑, 심우영 등과 공주에서 깊은 교분을 나눴다고도 한다.

이렇게 홍길동은 공주 일대에서 의적활동을 한 것이 여실하고 공주목사였던 허균이 소설로 살려낸 것이 증명되는데도 우리는 이것을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입으로만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이에 비해 전남 장성군은 홍길동이 태어난 곳임을 내세워 그 생가와 전시관을 짓고 테마파크를 꾸며 홍길동 축제를 십수 년째 열고 있다.

공주는 인물이 반(半)이다. 백제시대를 포함, 현재 남은 유적은 오히려 공주의 역사를 증언하지 못하고 있다. 인물과 이야기를 발굴하고 활용해야 한다. 그속에서도 초려의 유산은 대단히 풍부한 편이다.

그의 사상과 행적을 중심으로 하여 학술회의, 학생 백일장, 인문학 강의 및 유적 답사, 당대의 음악․의례․음식을 소재로 한 선비문화 체험 등으로 ‘초려문화제’를 기획해보면 좋겠다. 거듭 강조하지만, 초려 선생을 가장 잘 모셔야 할 곳은 우리 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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