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은 ‘사람의 됨됨이’나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간단하게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로부터 인류의 수양이나 교육의 핵심적 가치로 이를 부단히 강조해 왔음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인격을 갖춘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은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요컨대 그 의미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이를 얼마나 실천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에 빗대어 생긴 단어로 ‘국격’이란 게 있다. ‘국가의 품격’이란 말로 설명되는 이 단어는 국가에 사람과 대등한 위상을 부여할 수 있느냐의 문제 때문에 단어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 한 분과 보수 언론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한 결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었다. 그게 2011년의 일이다.

따라서 그 전에 출간된 국내 대부분의 국어사전에는 이 단어가 없다. 물론 과거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시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실례가 있기는 하다. 당시 사회적인 행태로 보아 이 어휘의 정치적인 함의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정치적인 목적성이 강한 말이다. 민주화 이후 이 말이 사어가 되어버린 역사가 이를 명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인격을 잘 갖춘 사람이 드물 듯이 국격을 갖추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나라도 그리 많지는 않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도 경제적인 부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는 있으나 약소국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자신들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정책이나 행동으로 그걸 보여주는 국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자국의 이익과 거대 기업의 편에 서서 그들을 착취하는 신식민지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더 많다. 그리고는 그걸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그럴듯한 이론으로 합리화하는 게 작금의 국제사회 맨얼굴이라 할 수 있다.

국격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국격과 관련된 국가의 위신이나 품격을 말할 때 외국의 예를 많이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조적인 한탄을 하며 우리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일부 삐뚤어진 보수주의자들은 한 술 더 떠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거나 근거 없는 사실을 들어 민족성을 비하하기도 한다.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국격의 상승은 국민 누구나 원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방안에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겠으나 그 중에 경제력, 국방력은 물론 문화, 시민의식 성장 등 다양한 지표의 상승은 필수적인 조건들이다.

이런 원론적인 조건들 외에 한 나라의 국격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한 요소로 필자는 대형 사고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를 들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재해가 되었든 인재가 되었든 대형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일단 사고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최소화하면서 수습을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잘 마련할 수 있는가는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책무이자 그들의 존재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고스란히 그 나라의 전체 국가 능력 및 국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난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 사건은 아직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모든 책임을 한 악덕 종교 지도자에게 전가하고 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그걸로 사건을 종결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목숨을 건 단식과 수 천 리의 행진, 철야 농성과 삼보 일배, 4대 종단 종교 지도자들의 호소에도 정부 여당은 꿈쩍 않고 있다.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던 자신의 말을 망각해 버렸고, 여당 국회의원들은 ‘살려 달라’며 엎드렸던 스스로를 잊은  채 선거가 끝나자마자 외려 야당과 유족을 역공하고 있다.

그들이 야당 시절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경제 살리기’라는 해괴한 감성 논리를 여당이 된 지금에도 자식 잃은 부모 앞에 들이대고 있다. 급기야 이런 기만적 권력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살기 싫다며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나고 있다. 
오죽하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부정하며 떠나겠다고 하겠는가. 일말의 상식이라도 갖춘 정치인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며 울분에 떠는지 헤아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생때같은 자식을 하루아침에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한 부모들이 생업을 버려두고 밥을 굶으며 요구하는 간단한 걸 왜 들어주지 못하나. 그들을 한 번 만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그들이 요구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오직 구조할 수 있는 데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 원인 규명을 통해 참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뿐이다. 그건 유족들의 요구 이전에 정부 여당이 당연히 해야 할 책무다. 그들 앞에서 이제 그만하자거나 경제를 망친다는 공격은 무책임한 권력의 망발이나 다름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다. 그나마 그들을 보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말을 정중히 들어주고, 재발 방지를 위한 원인 규명과 제도 마련밖에 없다. 그 앞에 어찌 권력의 이해관계나 법리 논쟁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런 자들은 사람의 탈을 쓴 비인격적 존재들이나 다름없다.

행복한 나라는 한 마디로 최소한이나마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라가 바로 국격이 높은 나라다. 국격은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대형 참사에 대처하는 방식만 놓고 봤을 때 부끄럽지만 우리나라의 국격은 낙제점이다.

그 핵심에 정치권, 특히 정부 여당의 무책임과 뻔뻔함이 가로놓여 있다. 그들 중에 인격을 갖춘 사람이 몇 사람만 있었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는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생각할 것이 있다. 그들을 뽑은 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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