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평도조제와 도자기축제 탐방기

새벽5시, 부지런을 떨며 출발한 버스가 부산국제터미널에 도착했다.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항구의 정취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한국도자문화협회와 공주에서 출발한 공주시청 관계자, 이삼평연구회, 계룡산도예촌 참가자(총 36명)들이 이삼평도조제 참석 및 도자문화 답사를 위해 삼삼오오 모이고 있었다.  

▲ 아리따 동산에 세워진 도조 이삼평비 전경

 일렁이는 파도를 뒤로 하고 도착한 후쿠오카 하카다항에서 단오절 행사를 만났다. 여행의 뜻하지 않은 기쁨이랄까. 전통의 복장과 악기연주. 그리고 여행 내내 만나게 되는 잉어모양의 인형(코이노보리). 바람에 날리는 코이노보리를 보며 등용문의 꿈을 키운 일본의 전통의식이 우리의 생활과 낯설지 않다.

이삼평기념비 이전 한일 협의

하카타항에서 사가현의 아리타에 도착한 일행 중 한국측(한국도자문화협회, 공주시청 성장전략발전단 노재헌 단장과 송병선 과장, 강환구 계장, 이삼평연구회 이종태 회장과 신용희 부회장)은 공주의 박정자 삼거리에 위치한 이삼평비 이전과 관련해 이리타정과 협의를 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도자기 전시장을 방문했다. 

▲ 이삼평 기념비 이전협의회에서 노재헌 단장이 이전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태 회장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번 한일간 협의에서는 공주시청에서 사전에 준비해 간 기념비 이전 부지와 계획서, 사진 등의 자료에 아리타측에서는 공주가 기념비 이전과 관련해서 추진하고 있는 과정과 수고로움에 크게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양한 도자기를 보면서 세계의 도자기도시 아리타가 한 조선의 도공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니 정말 놀라웠다. 정유재란 때에(1598년) 일본 나베시마군에 의해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 자기(磁器)의 원료가 되는 백자광을 발견하고 1616년 백자를 구어 냄으로써 일본은 꿈에도 그리던 도자기생산국이 된다. 이렇게 생산된 질 좋은 도자기들이 일본국내뿐 아니라 유럽에 인기를 끌며 부(富)와 도자기 도시로서의 명성까지 안겨준 것. 그러한 고마움을 담아 일본인들이 1990년 이삼평의 고향 공주 반포면 온천리에 세운 비(碑)가 도로확장으로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도자기축제의 성공요인은?

5월4일 이삼평도조제가 열리는 날 아침. 오락가락하는 비 속에서 자그마한 시골마을 아리타는 도자기축제 준비에 한창이다. 2016년은 도자기를 구운지 400주년 되는 해로 이 행사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생각하며 벌써부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 2016년에 개최될 400주년 도자기 축제 홍보물

 아리타에 현존하는 가마터는 160여개, 도자기 상점은 300여개로 이 작은 마을에 축제기간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그 기간 동안 번 돈으로 일 년을 먹고 산다니 성공한 축제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아리타 마을은 동에서 서로 길게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도자기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도자기와 도공이 반출되거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높고 깊은 산골짜기에 일자형 도로만 내어 감시를 했다는 것. 참 말만 들어도 평생 감시받는 삶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도조제가 열리는 도산신사는 이도로의 가운데쯤 산에 모셔져 있는데 천황을 제외하고는 산에 신사를 두지 않는 다니 이삼평공의 위상이 어떤지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또한 끌고 간 나베시마와 끌려 간 이삼평이 함께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도조제가 열리기전에 백자광과 가까운 동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예사롭지 않다. 국가지정보호수인데 아리타 도자기의 역사를 모두 지켜본 나무란다.

그 옆을 끼고 흐르는 작은 냇물을 따라 깔끔하게 토담이 쳐진 집들 사이를 걸어 오다보니 담에는 도자기 조각들이 나름의 멋으로 박혀있고, 토담으로 보인 것은 가마 부서진 것을 담으로 쌓은 것 이란다.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과 함께 정말 운치 있는 골목길이었다.

이삼평도조비 옆에 양국기가 나란히

다시 도로로 나와 신사(神社)로 향하는 바쁜 발걸음 사이로 호객하는 명랑한 목소리들이 좁은 거리를 활기로 채운다. 신사에는 제를 준비하는 제관들이 전통복장으로 경건하게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아리타 지역 인사와 초등학생까지 제에 참석하는 모습은 아리타 주민 모두가 그를 얼마나 추앙하는지를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 추모제 의식 행사 중 신녀들의 춤

 이삼평을 추모하고 고마움을 기리는 도조제는 엄숙한 가운데 치러졌다. 아리타의 대표와 한국측 대표의 추모사에 이어 신녀들의 의식무용과 제복은 어쩐지 우리의 것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리타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 정상에 세워진 이삼평도조비 양 옆의 펄럭이는 태극기와 일장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게 된다.

이들은 침체해 가고 있는 아리타의 도자기 산업을 이삼평을 통해 더 널리 알리고 부흥을 맞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제를 지내고 있었다.

도산신사를 내려오는 길에 이삼평 14대 손 가네가에 쇼헤이씨가 운영하는 공방에 들러 보았다. 늦게 가업을 잇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조선의 정서가 느껴지는 백자를 만들고 있었다.  

▲ 이삼평 도공의 14대손 가네가에 쇼헤이씨

 이삼평이 발견한 백자광 이즈미야마 채석장은 사적지로 채석이 금지되어 있는데 요즈음 그 자석을 몇몇 공방에만 공급해 주었단다. 더 이상 채석하지 않는 자석을 공급 받아 만든 백자라고 설명해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이삼평의 후손의 모습이다. 작고 소박해 보이는 공방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다양한 도자기를 보며 서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언덕 위에 규슈도자박물관을 만난다. 축제기간이라 그런지 어김없이 홍보화면에 이삼평이 주인공이다.  규슈도자박물관의 문고리, 화장실 변기, 휴지통 하나도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 도자기로 만든 오르골 시계는 박물관의 명물. 어린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 프로그램으로 도자기를 활용한 볼거리는 우리가 배워야 할 항목이다.

아리타의 일정을 마치며 역에 모인 우리는 역사입구에  무심히 놓인 도석(陶石)을 보며 아리타의 조선도공의 삶을 지켜 보았을 도석을 향해 묻고 싶은 질문들을 가슴에 담은 채  버스에 올랐다.

이마리의 고려인 묘

아리타를 떠나 3일째 여정. 이마리 도자마을이다. 이마리만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던 곳으로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기들이 궁중 장식품으로 중요시되면서 일본의 도자기를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항구도시이다.  

▲ 이마리 마을에 있는 고려인 도공의 묘 앞에서 참배하는 일행

 이마리 도자마을은 마을지도, 다리, 화장실 입구 등 손길이 닫는 곳마다 도자기로 장식되었고 공방들도 품격있는 전시로 도자기의 가치를 잘 살려내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곳에 고려교(高麗橋)라는 다리와 고려인의 묘(墓)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조선도공 이전에 고려도공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임진왜란을 일으켜 도자기를 약탈해 가고 도공들을 끌고 간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들의 묘는 숲 속에 작은 비석으로 남아 있어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도자기를 구우며 살아간 우리의 선조를 위한 묵념을 갖고 고려인 도공의 망향을 맘 속으로 위로했다.

하사미의 세계도자기가마공원

이마리 도자마을을 나와 나가사끼현의 하사미 세계도자가마공원을 돌아보았다. 도자기축제가 한창이다. 언덕위에는 세계 여러나라의 도자 가마를 재현해 놓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아리따역 앞에 있는 이즈미야마의 도석

 이 마을 역시 이우경이라는 조선도공에 의해 도자마을이 형성되었고 도조로 추앙받고 있었다. 2만5천명의 인구 중 3천명이 도자기 관련 사업을 하고 일본 식기류의 11%가 이곳 제품이라니 참으로 놀라웠다.

전통을 고수하는 온다야끼마을

이번 여행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오이타현 히타시에 있는 온다야끼 도예촌. 말 그대로 지금도 첩첩산중이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10개의 공방이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으며 모든 공방이 전 과정을 전통방식으로 도자기를 구어 낸다고 한다.

산에서 채취한 흙을 계곡의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만든 물레방아로 찧어 곱게 만들고, 여러 번의 수비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앙금은 뭉텅이로 뭉쳐져 햇볕에 은근히 말려 진다. 손반죽으로 그릇이 만들어 지고 발로 차가며 회전시키는 목물레를 사용한다.

물론 가마 또한 크고 길다란 장작 가마이다. 공방을 구경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 전 작업 과정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과거 속에서 도자기를 굽는 이들이 생계는 어떻게 꾸려 갈까가 갑자기 궁금해 졌다.  

▲ 온다야끼 마을에서는 전통방식으로 도자기를 굽고 있다. 사진은 온다야끼 마을 주민이 전통방식으로 흙을 거르고 있는 장면

 가이드의 말이 큰 도시의 백화점에서 높은 가격에 전량 판매를 해준단다. 도자기를 사랑하는 일본인의 정서에 놀라고 300년을 끈기 있게 전통을 고수해온 이곳 도공들의 장인 정신에 두 번 놀라게 된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쿵쿵 시원하게 물보라를 만들어 내던 물레방아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은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물레방아를 이곳에서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얘기에 전통을 지켜나간 이들의 혜안에 놀랍고 한편 부럽다.

공주의 이삼평으로 재탄생돼야

3박4일의 일정 마지막 날 후쿠오카의 학문과 문화의 신을 모신 천만궁을 들렀다. 신사의 수많은 기원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다. 마치 등용문의 꿈을 키우며 코이노보리가 바람에 펄럭이며 우리를 맞아 주었던 것처럼.

돌아오는 배안에서 바다를 본다. 끌려가던 도공들의 절규를 그 속 깊이 묻어 두었는지 잔잔하기만 하다. 이름 모를 골짜기에 갇혀 도자기 만드는 일로 생명을 부지해야 했던 조선의 도공들. 그들이 세계의 유명한 도자기 도시를 탄생시켰고 그곳의 도자기신(도신)이 되어 있다. 그의 후손들이 14대 이삼평, 14대 심수관 등의 이름으로 가업을 잇고 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이삼평도조제를 참석하고 때맞추어 열리는 도자기축제를 구경하면서 생각해본다.

아리타가 세계적인 인물을 공짜로 얻은 셈이라고 생각하기 쉬지만 그들은 한 인물의 업적과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이삼평의 고향 공주 반포면 온천리에 기념비를 세워 이삼평을 기리고자 했다.

이제 아리타의 도신 이삼평이 공주의 이삼평으로 재탄생 되어야 할 일이 남은 것 같다. 고향을 그리며 타국의 별이 된 이삼평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의 별로 다시 높게 떠오르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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