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미국의 한 잡지에서 공주 소개 글을 부탁받았다. 공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한된 지면에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공주의 오늘이 있게 한 DNA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공주는 금강이라는 젖줄 없이는 형성될 수 없었다. 거기에 계룡산을 지붕이자 울타리 삼았다.

공주는 구석기인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곳 중 하나다. 인류가 떠돌지 않고 붙어살기에 천혜의 조건이었다.

서기 475년, 한반도 중앙부에 자리 잡았던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남천할 때 공주에 머문 이유는 뭘까. 공주가 가진 지정학의 비밀이 여기서 풀린다.

북쪽은 차량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금강이 두터운 해자를 둘렀다. 동남쪽에 계룡산이 범접할 수 없게 높이 솟아있다. 호서와 호남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공산성 마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살피면 백제가 왜 이곳에 도읍했는지 알 수 있다. 새 수도 웅진은 중흥의 기반을 닦기에 적당했다. 웅진백제(475-538년)는 중국 남조와 문물을 활발히 교류하고 착실히 실력을 길러 남쪽의 탐라국까지 경영했다.

역사상 최초의 한중일간 국제분쟁의 결과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통일신라가 웅천주를 공주에 두어 통치한 것도 당연했다. 공주라는 이름을 얻은 고려조에는 전국 12개 목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공주의 지정학은 임진왜란을 호되게 겪은 후인 1602년부터 장장 300여년 간 충청도의 관찰사가 주재하는 요충의 역할로 이어졌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지정학적 요충이기에 때때로 큰 난리에 휩싸였다. 통일신라 때 김헌창의 난(822년)이 여기서 일어나 충청-전라지역을 경략하더니, 고려조에는 망이-망소이의 난(1176년)의 진원지로서 1년 반 동안 왕조를 크게 뒤흔드는 격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근대화에 뒤처져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주 공략지가 되어 수만의 인명이 상했다.

공주의 성격을 정한 것 중의 하나가 계룡산의 존재다. 계룡산은 높이가 845미터로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산으로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나라의 진산으로 꼽힌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주봉인 상봉을 비롯하여 삼불봉, 연천봉, 문필봉 등의 봉우리가 열댓 개나 되고 곳곳에 기암괴석이 솟아 있다.

멀리서 봤을 때 마치 닭의 볏을 쓴 용과 같이 보여 계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산세가 신비롭고 그윽하여 언젠가 왕조가 도읍할 곳이라는 도참설과 함께 갖가지 민간신앙이 싹튼 곳이기도 하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 서악으로 전국의 다섯 명산에 들어 해마다 제사를 바쳤고, 조선시대에도 묘향산(상악단), 지리산(하악단)과 함께 중악단을 이 산의 신원사에 세워 해마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976년에 산업화에 편승한 종교정화운동으로 계룡산 명승지 골골마다 들어선 무허가 교당과 암자와 수도원, 기도원 들이 철거되었는데 그 숫자가 2백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오늘의 공주를 만든 인물로 먼저 백제 25대 무령왕을 꼽아야겠다. 그는 23년 동안 재임하며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사후 1448년이 지나 발굴된 자신의 왕릉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 찬란한 백제문화의 진수를 웅변하고 있다.

조선 세종조에 지금의 중국-북한의 경계가 된 영토를 개척한 김종서는 공주 의당에서 나서 세종-문종-단종시대를 이끈 중신의 역할을 다하다가 왕권을 노리는 수양대군에게 참살되었다.

계룡산 갑사의 승려였던 영규는 임진왜란 때 승병 7백명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하고 이어 의병장 조헌을 도와 금산성을 공략하다가 패배하고 전사하여 계룡산에 묻혔다.

계룡산 철화분청의 요람인 반포의 도공 이삼평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끌려가 오늘날 이마리(아리타)자기라고 불리는 일본 백자의 시조가 되었다.

침술의학에 특히 뛰어났던 허임은 허준의 천거로 궁중에 들어가 실력을 발휘하고 세자인 광해군을 호종하여 임란을 치른 뒤 공주 내산리에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고 ‘침구겸험방’을 펴내 동아시아 침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충청5현으로 꼽히는 초려 이유태는 공주 상왕동 용문서원을 근거로 학문을 펼치고 선조에게 <기해봉사>라는 장문의 국정개혁안을 올린 경세가로 기록되고 있다.

공주 정안 출신의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은 일본의 근대화모델을 본딴 개화혁명을 시도하다가 정세 판단의 잘못과 주체역량 부족으로 ‘3일 천하’에 그치고 일본에서 10년동안 망명생활 후에 중국 상해에서 정권측에 의해 피살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동양화단의 핵심인물로 한국적 산수화를 개척한  청전 이상범, ‘바보산수’ 등 독창적 한국화를 그려낸 운보 김기창도 공주에 태를 묻었다. 전통 판소리를 복원하고 대중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 박동진은 고향 무릉동에서 죽는 날까지 소리공부를 쉬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하지만 때때로 커다란 격동을 겪은 공주와 공주사람들은 오는 7월 유네스코의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를 기점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람이 세게 부는 걸 겪으면 몸을 움츠리게 된다. 상실의 경험이 거듭되면 내것을 지키고 높이려는 자아가 커진다. 위기와 기회가 함께 오는 시절에 공주사람들이 특유의 자존감을 어떻게 보여줄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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