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타에 거주하는 이삼평의 열성 팬 한 사람이 ‘소설 이삼평’을 출간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소설 이삼평’이라고 했지만, 이는 소설의 제목은 아니다. 소설의 제목은 ‘일본 자기 발상(發祥) –도공 이삼평공의 생애’이다.

▲ 구로카미의 이삼평 소설 ‘일본 자기 발상’의 표지(앞, 뒤)

소설의 제목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서적 같은 제목이다. 저자는 구로카미 슈텐도(黑髮酒呑童), 이것은 필명이고 본명은 요시지마 미키오(吉島幹夫)이다. 필명의 ‘구로카미(黑髮)’는 아리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아리타의 주산(主山)이 ‘구로카미 산((黑髮山)’이기 때문이다.

쿠로카미의 집념

아리타의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구로카미 씨가 이삼평 소설을 생각한 것은 1992년부터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공주에 건립한 이삼평기념비 비문에 대한 항의 운동을 목도한 이후였다.

이삼평은 아리타의 도조이기도 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겨진 한일 두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이 혼재되어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구로카미 씨는 정년을 4년 앞두고 퇴직, 이삼평 소설의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각종 문헌 자료의 섭렵은 물론 수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소설을 통하여 그가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이삼평이라는 극적 인물의 독특한 인생 역정에 대한 정리였다.

사실 조선 출신의 무명의 도공이 이역 아리타에서 도자기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드라마틱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로카미는 소설을 통하여 침략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받았던 조선, 그러나 그 틈바구니에서 이삼평에 의한 도자기 역사가 일본에서 새로 꽃을 피우게 되는 역사의 이중성과 아이러니, 실패와 성공을 대비 시키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된 이삼평

내가 특별히 이 소설에서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이삼평에 대한 여러 논란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우선 소설에서 이삼평의 출신지는 ‘공주 학봉리’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왜군과 처음 조우하는 곳은 학봉리나 계룡산이 아니고, 속리산의 법주사였다.

이삼평이 법주사에 친구들과 함께 수행차 왔다는 것인데, 그 시점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의 4월 24일로 되어 있다.

삼평 일행 5인이 법주사를 겨우 벗어나 고향 학봉리에 돌아온 것은 4월 30일, 돌아와 보니 사기를 굽던 가마는 왜군들에 의하여 파괴되고, 마을은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삼평의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들조차 죽음을 당한 상태였다.

혼자 몸이 된 삼평은  더 전문적인 도자기 수업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경기도의 광주는 전란으로 인하여 신변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여 이삼평은 왜군의 침입이 미치지 않은 남원으로 내려간다. 남원 만복사의 사기소, 그것이 이삼평의 새로운 출발지였다.

남원에서의 도예 수업으로 이삼평의 도예 기술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1597년 8월 왜군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직전, 이삼평 일행은 남원을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함양에서 남원으로 향하던 나베시마 군에 의하여 이삼평은 체포되고 만다. 여기에서 이삼평은 남원성에 대한 길안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남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토 등의 군에 의하여 남원성이 함락된 상태였다.

1598년 토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왜군은 조선에서 철군하였다. 이삼평이 나베시마 군에 의하여 다쿠에 옮겨지고, 이후 다시 도석이 발견된 아리타로 옮겨 백자 생산에 전력을 다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1655년 8월 1일, 77세의 나이 이삼평이 이역 아리타에서 세상을 뜨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가 미리 준비한 백색의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리를 입혀주는 것으로 일생이 마감되는 것이다. 그는 이역 일본에서도 결코 고국 조선과 학봉리 고향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류’가 이루어낸 따뜻한 성취

소설을 자비 출간한 구로카미는 이 작품이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읽혀지기를 바라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 소박한 바램이 최근에 드디어 이루어졌다. ‘지식과감성’이라는 출판사에서 <일본도자기의 신, 사기장 이삼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간행일은 2015년 4월 30일, 439쪽의 적지 않은 분량이다.  

번역본 <사기장 이삼평>이 국내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인숙이라는 한 사람의 집념 때문이다. 나인숙은 ‘한일친선교류협회 난류’의 대표이다.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에 유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오랜 세월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나인숙 선생은 한일 민간교류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2009년 ‘난류’라는 법인을 만들어 활동해오고 있다. 왜군에 의하여 졸지에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경험한 이삼평이 도리어 일본의 도조로 추앙받게 된 이삼평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번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역 출판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난해한 지명과 인명, 역사용어는 번역자에게는 넘기 어려운 높은 산이었다. 또 다른 난제가 있었다. 출판 비용의 문제였다.

우선 난류 회원 4명, 김창복, 노미애, 홍남희, 홍성숙이 번역을 분담하기로 하고 나인숙이 그 작업을 점검하였다. 출판은 이삼평의 출신지인 공주시의 재정적 도움을 받는 것으로 협의가 진행되었다. 번역의 초고가 만들어졌을 때, 나에게 나인숙 이사장을 공주에서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무렵 나는 공주에서 ‘이삼평연구회’(회장 이종태)라는 시민 모임의 창립에 간여하고 있었다. 공주 박정자, 학봉리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외롭게 서 있는 이삼평 기념비를 위하여, 시민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공주시에서 출판비를 돕기로 한 애초의 약속은, 그러나 지켜지지 못하였다. 불필요한 ‘오해’의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삼평은 ‘건너가’라는 단어 하나에 묶여 10년을 얼굴 붉혔던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한일관계는 너무 예민하여, 단어 하나에도 조사(助詞) 하나에도, 쉽게 오해되고 진의(眞意)가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한일 수교 50년’에도 불구하고 지금 오랜 냉각기를 지나고 있는 한일관계는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편협한 역사 인식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로간의 오해와 불신이 너무 뿌리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나인숙 이사장은 출판 비용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뜻밖의 도움은 남원에서 왔다. 도자기 문제로 지면(知面)을 갖게 된 남원의 정창진 선생이 병상에서 비용을 지원한 것이다. 작가 구로카미의 소설도 그렇지만, <사기장 이삼평> 번역의 출간도 이처럼 다난한 고개를 넘어서 가까스로 이루어진 것이다. 
 
21세기, 세라믹 로드의 길

딱 1년 후인 2016년은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백자를 생산한지 400년이 되는 해이다. ‘아리타 4백년’은 일본 도예의 역사, 그리고 사가(佐賀) 지방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삼평의 기념비가 세워진 공주와 충청남도에서는 이 400년을 어떻게 맞을 생각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이삼평이 아리타의 백자 도석(陶石)을 발견한 것이 ‘6월 1일’이라 하였다.

구로카미는 번역 소설의 후기(後記)에서 한·중·일을 연결하는 세라믹 로드, 그리고 이를 부각하는 세계문화유산의 추진을 제안하고 있다. 도자기가 중국에서 발생하여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문화 역사를 선도해갔던 사건을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 경덕진, 공주 학봉리, 그리고 아리타의 도자 유적을 연계하는 세계유산의 추진을 제안한 것이다. 거기에는 ‘문화와 전쟁’이라는 영광과 상처가 뒤섞여 있다.

이제 이삼평의 이야기에는 구로카미와 난류의 아름다운 뜻이 함께 더해질 것이다. 2016년아리타 400년에 시작되는 앞으로의 ‘새 400년’은, 이삼평에 더하여 구로카미와 ‘난류’의 따뜻한 사연이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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