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건설이 시작된 뒤로 공주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장기면과 의당면을 세종시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다. 세종시 지역으로 인구유출 현상마저 심각하여 공주시의 존립 자체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종시와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시세가 약한 공주시가 세종시의 영향권에 종속될 것이라고 보고, 차라리 세종시의 일부로 들어가 그 이익을 공유하자는 생각일 것이다.

이러한 통합론은 공주시의 발전 동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나약한 패배주의적 단견에 불과하다.

이제 공주시민들이 나약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도시의 발전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몇 가지 지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선 공주시는 유구한 역사의 고장이라는 점이다. 공주시는 1932년에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장장 1,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국가통치 및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 왔던 천년 웅도(雄都)이다.

백제시대에는 5대 64년간 왕도였다. 통일신라 때는 지방행정의 거점 9개 주 가운데 하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지방통치의 거점 12목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청주, 충주, 홍주와 더불어 충청도의 거점 4목 가운데 하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도의 감영이 공주에 소재하였을 때는 공충도, 공청도, 공홍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시대의 지방행정제도 개편에서도 충청남도의 관찰사 소재지였던 것이다.

다행히 지난 7월 이러한 공주시의 역사적 위상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되어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덕분에 공주시민들의 답답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역사는 문화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공주시는 오랜 역사를 통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품게 된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한 것이 바로 백제문화제이다.

백제문화 뿐이 아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공주시에서 꽃 피운 다양한 문화적 자산을 활용한다면, 문화도시 공주의 시민 각자가 문화생산자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자연미술의 진원지로 자리를 잡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같은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공주시가 이처럼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주제로 하여 도시를 가꾸어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계 각지로부터 그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문화소비자 즉, 관광객이 많이 오게 마련이다. 관광산업이 공주시의 도시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전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공주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육도시이다. 공주시가 교육도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단순히 학교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중추를 감당해 온 공주사범대학이 공주시에 존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공주교육대학도 있다. 앞으로 두 대학을 통합하여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나 영국의 케임브리지처럼 유서 깊은 대학도시로 가꾸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역사, 문화, 관광, 교육과 함께 공주시의 발전을 견인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연을 빼놓을 수 없다. 공주시는 우리나라 5대 명산의 중심인 계룡산을 기둥으로 삼고, 4대 하천의 하나인 금강으로 허리를 두른 천혜의 조건을 갖춘 자연의 도시이다.

공주만큼 자연이 살아있는 친환경도시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머지않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될 것이고, 생활방식도 크게 바뀔 것이다. 자연에의 회귀를 통해 생활의 여유와 건강, 심미적 휴식과 목가적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때 그들에게 공해에 찌든 대도시보다 공주시처럼 자연이 살아있는 삶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미래지향으로 공주시민의 시민의식과 기상이 진취적으로 약동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활력이 넘치면서도 교양과 여유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살맛나는 공주시가 자리를 잡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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