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출신 이삼평 공에 의해 탄생된 일본 도자의 원류 아리타 도자기와 도조제

오늘은 이삼평도조제 참석하는 날. 우리의 메인 행사이다. 아침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아리타로 향하였다.

▲ 도산신사 모습

山은 온통 녹색의 푸르름으로 싱그러웠고 川은 어제 쏟아진 폭우로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꼬불꼬불 산골짜기를 들어가다 보니 유전천(有田川)이란 팻말이 보였고 아리타에 거의 도착한 것 같았다.

9시 30분 경 도산신사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서둘러 도조제의 장소인 이삼평 비를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도조 이삼평비를 약 50여m 남겨두고 길가에 도조 이삼평 비에 대한 설명과 「도산」이라는 시비가 있었는데 「도조 이삼평」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삼평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금강)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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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마쓰우라군 아리타 마을의 미다이바시에 가마를 짓고 드디어 이즈미야미에서 최상급의 원료가 되는 백자광을 발견하자 가미시라카와로 옮겨 살며 순백색의 자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도자기가 소성된 유래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 제조 기술은 수많은 도공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아리타 도자기의 오늘의 번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삼평공은 아리타도자기의 시조일 뿐 아니라 일본 요업계의 대 은인이다. 오늘날도 도자기 관련업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이 선인이 남긴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공적을 높이 받들고 존경하고 있다. 이에 ‘2,005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한일 양국민의 진정한 이해와 우호 친선이 더 한층 발전하는 동시에 이 뜻 깊은 교류의 역사가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길 기원한다. 2005년 7월 길일.  이삼평공 헌창위원회.”

이 비의 설명문을 보고 바로 올라가면 ‘陶祖李參平碑’라고 대형 글씨가 새겨진 오벨리스크형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삼평 비이다. 아리타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위치하여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이곳에서 오늘 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삼평비의 내용. 일어 한국어, 영어로 되어 있음

제례의식은 일본의 전통 제례에 의해 강신의식, 헌찬, 제문봉상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제문은 일본 아리타상공회의소 회장과 한국도자문화협회 회장이 같이 제문을 올렸다.

한국의 오유근 회장의 제문에는 이 제례에 31번 째 참석하게 된 것과 이삼평기념비가 공주시, 아리타정, 한국도자문화협회, 이삼평연구회의 협의 하에 최적의 부지인 반포면 학봉리 794-64번지로 옮겨가게 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시간 이십분 정도의 긴 시간이었는데 모두들 엄숙히 성의를 다해 제례를 올리는 것 같다.

제례 중에 내가 특별히 느낀 몇 가지는 첫째로는 이 지역 초, 중학생들의 참배가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공부에 방해된다고 되도록 참석을 안 하려고 하고 학부모들도 참석을 시키지 않으려하는 분위기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일본식의 강신례

둘째로는 제례 식장의 천막이 엄청 튼튼하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우리 행사 시간 중에 바람이 아주 심하였고 더구나 행사장은 거의 산꼭대기 벼랑에 위치하여 그 바람을 직접 다 맞는데 그 심한 바람에도 끄떡없는 것이다. 나는 내심 이 천막이 날아갈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였는데 일본인들이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천막을 친 것을 잘 보니 지주 밑에 60kg 정도의 납덩이로 지주를 튼튼하게 고정하였을 뿐 아니라 밧줄도 튼튼하게 고정시켜서 그 바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를 보고 나는 “일본에는 대충이라는 것이 없구나. 그 많은 지진과 화산 그리고 태풍 속에 버티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고는 우리나라가 자연재해로 부터 얼마나 편안한 나라인지 하는 생각과 한국의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 일본 중학생의 참배

셋째로는 식장의 중간쯤에 설치된 모니터의 화면이 90도로 뉘어져서 식의 모습이 방영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보았나”하고 내 눈을 의심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잘못된 것이다. 카메라가 잘못되었든지 모니터 작동이 잘못되었든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40분이 지날 때까지 이 모니터를 보고 있는 수많은 일본의 사람들이 한 명도 이의를 걸지 않는 것이다.

식이 거의 끝나갈 즈음. 아리타정의 공무원이 지나가니 한 사람이 조용히 눈짓으로 그 것을 지적하고 그 공무원은 바로 영상 팀에게 연락해 잘못된 모니터를 수정하더라. 이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일본인들의 참을성, 단체에서 튀지 않으려는 그들의 민족성에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 풍물놀이. 이삼평공의 영전에 그가 생전에 그렇게 듣고 싶어 하였을 한국의 소리를 듣게 해주자는 취지에 한국의 풍물 공연을 식의 마지막 부분에 넣었다. 일본 측에서 꼭 이삼평공의 고향 공주 학봉리 사람들이 와야 한다는 요청으로 학봉리 풍물단 4명이 와서 신명나는 한국의 소리를 울려댔다.

▲ 제례 마지막 부분에 울려 퍼진 한국의 소리

이 한국의 소리를 그렇게 듣고 싶어 했을 이공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뿐 아니라 이곳을 찾은 한국인의 생각도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고, 윤용혁 교수의 사모님인 나정희 선생도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하셨다.

식이 끝나고 우리는 축제의 거리로 나갔다. 축제장에서 악기를 가지고 바로 철수한 우리의 학봉리 사물놀이패가 거리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들의 공연을 지켜보고 열심히 사진도 찍었다. 일본인들에게 뺑 둘러싸인 거리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사물이 신나게 울려대고 있다.

▲ 학봉리 풍물단의 아리타축제 거리공연

내 귀에는 이 한국의 가락이 마치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열정과 신명이 일본도자기를 원초가 되었다”고 소리치는 듯하였다. 또 이곳에서 둥근 달을 바라보고 고향 생각을 하였을 이삼평 공이 한국의 소리에 흥이 나서 덩실 덩실 춤을 출 것만 같은 상상이 되었다.  

이삼평공의 14대 손이 운영하고 있는 도자 판매장을 찾았다. 서로 수인사를 하니 고향집 사람들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다. 가게에 들어가며 왼쪽에는 이 도자기의 원조인 이삼평 공의 조각상을 정성스럽게 모셔 놓았으며 정면에는 이삼평 공 이후에 내려오는 가게의 내력과 연구물들을 비치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이 14대 손이 새로 개발한 백자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곳곳에 판매대도 있어 이들이 제작한 도자기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백자 계통이었다. 가게의 또 한 쪽에서는 이재황 교수가  KBS 다큐멘터리 “도자기 루트”를 찍느라 정신이 없다.

▲ 이삼평14대 가게

국영방송 KBS가 야심차게 기획한 다큐멘터리 ‘도자기 루트’에 우리 공주의 학봉리에서 일본까지 전해지는 도자기 전파의 스토리가 나오고 우리 ‘이삼평연구회’의 사무국장인 이재황 교수님이 이 다큐의 중심인물이 된다니 ‘이삼평연구회’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올 가을에 이 다큐물이 방영된다고 하니 공주 분들이 꼭 이 다큐 물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도자기를 공부하는 부산의 대학원 학생은 이곳에서 이삼평요의 도자기 작품을 아주 싸게 샀다고 자랑을 한다. 학생이라 돈이 없으니 깎아 달라고 사정해서 이삼평 14대요의 백자 작품을 구입하였는데 심수관요에서는 이런 사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삼평14대 손의 인터뷰

그래서 내가 한말이 “공주 사람들이 원래 마음이 좋아요. 아마 이삼평 14대손도 그런 공주의 넉넉한 인심을 유전적으로 받아 마음이 너그러운 것이 아닐까합니다” 하고는 은근히 공주의 자랑을 하였다.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된 이삼평 사저 터.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길가에 흰색 도자기로 “일본 백자기 아리타 자기의 할아버지 이삼평저”라는 자랑스러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는 이곳에서 발견한 백자광석을 깨던 물레방아가 지금도 보전이 되어 있었다.

▲ 이삼평의 집터

즉 물레방아의 힘에 의해 백색 도자기의 원료인 광석을 부수는 기계이다. 이어서 찾은 곳은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 정식 명칭은 천구곡요적(天狗谷窯跡)이다. 아래에서부터 불을 때서 뜨거운 온도를 잘 활용한 가마터로 층층이 만들어진 가마 방이 약 12개 정도로 그 크기가 엄청났다. 이곳에서 나온 자기들이 거의 대부분 백자 계통이니 아마도 이삼평공이 초기 백자를 굽던 가마타가 아닌가 싶다. 

▲ 백자광을 부수던 물레방아

이 마을의 시라카와 공동묘지 입구에 “아리타 역사상 훌륭한 인물이 잠들어 있다”라는 명패가 있었고 여기에 ‘初代 李參平之墓’의 글이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공동묘지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이삼평의 묘소가 있고 그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7세기 초. 아리타 사라야마에서는 일본에서 최초로 자기를 구웠습니다. 그 도자기 장인들의 집단을 이끈 이가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데려 온 이삼평, 즉 초대 카나가에 삼베에라 합니다. 아리타 정에서는 창업 300년을 맞아 1916년 도산신사 뒤편 언덕에 「도조 이삼평의 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려 왔습니다. 1959년 이곳 시라카와 공동묘지에서「월창정심거사-月窓淨心居士」란 계명의 묘비가 발견되었고, 1967년에는 이것이 이삼평의 무덤이라고 확인되자 즉시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1967년 3월 20일. 아리타정교육위원회”

경건한 마음으로 이삼평 묘소를 참배한 후에 축제장으로 향하여 도자기를 구경하였다. 그 중 재미있었던 것이 깜짝 세일이다. 도자기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상점의 직원들이 도자기가 잔뜩 쌓인 바구니를 길거리에다 막 가져다 놓는다.

▲ 초기 백자를 구었던 도요지와 윤용혁 교수

그러더니만 핸드 마이크로 단지 5분 동안만 길거리가 가져다 놓은 모든 도자기를 1,000엔에 판다고 선전을 한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그릇들을 집어 가는데 가격표를 보니 2~3천 엔 정도의 물건들이었다.

나도 잽싸게 그들 틈에 끼어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그 중 3,400엔의 가격표가 붙은 깨끗한 백자접시 하나를 구입하였다. 내가 물건을 구입하고 나자 바로 점원들이 길거리에 내 놓았던 물품들을 가게로 다시 가져가는데 정확히 5분 간 만 판매를 한 것이다. 오늘도 운이 좋아 좋은 도자기를 싸게 산 것 같다.

이곳 아리타 정은 조그만 소도시인데 상유전역에서 유전역 까지 2Km가 훨씬 넘는 메인 도로 양쪽이 모두 도자기 상점이다. 아리타 도자미술관에서 예술성 높은 도자기를 감상하고 천천히 아리타역 쪽으로 가며 도자기 상점을 구경하였다. 볼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지만 아이 쇼핑으로 만족하며 유전역 가까이 가서 규슈도자 문화관에 5시 10분경에 도착하였는데 폐관이 되었다.

▲ 공동묘지 입구의 팻말

안내판을 보니 5시 까지만 운영하는 것이다. 미리 이곳을 보고 축제장을 둘러볼 껄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 사가 현립 규슈도자문화관은 역사적, 미술적, 산업적으로 중요한 도자기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제 5전시실 까지 있다.

규슈의 고도자기에서 현대 도예가의 작품까지 있고 특히 중요한 것은 규슈도자의 역사관으로 수출용 이마라 도자기가 아주 훌륭하다고 한다. 이 여행기를 읽고 아리타에 가시는 분은 아리타의 대표적인 도자문화관을 꼭 보시길 부탁합니다. 

▲ 묘소 참배

저녁 8시, 이마리 시의 스시 전문점에서 저녁식사.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미리 전화로 예약하여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스시의 종류가 수십 가지이다. 이것저것 다양한 스시를 골고루 시켰는데 스시가 도착하는 것이 신기하게도 레일을 타고 도착하는 것이다.

음식이 정확히 레일을 타고 도착하고, 우리는 우리식탁 옆 창구를 통해 주문한 음식을 꺼내 식탁에 놓고 먹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처음 경험하였는데 과연 “일본인다운 발상이다”라고 생각되었다.

▲ 아리타국제도자전 프랑카드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모든 음식은 레일로 전달되지만 사케, 맥주 등 술을 시키면 점원이 가져오는 것이다. 술도 레일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데 그리 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다. 여하튼 다양한 스시를 실컷 먹고 호텔로 돌아와 하루를 마감하였다. /(계속)

▲ 규슈도자문화관에서 바라본 아리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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