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공주에 고려시대 중기에 강직한 언관의 자취를 크게 남긴 인물이 있다. 바로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 허랑방탕한 왕의 통치를 바로잡기 위해 직간했지만 거부되자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고향인 나주 남평으로 내려가던 길에 공주 유구역에 묵으면서 시 한 편을 남겼다.

주운*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은 명예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원앙**이 수레를 막아선 것이 어찌 자신을 위해서였으랴.
한 조각 붉은 정성, 임금이 몰라주니          
여윈 말에 채찍질하며 머뭇머뭇 물러가네.    

  (*중국 한나라 때 주운은 임금에게 충간하다가 끌려 나가며 붙잡고 있던 난간을 부러뜨렸으며, ** 원앙은 임금의 수레가 험준한 길을 가지 못하게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이 일화가 전하는 공주 유구읍 추계리에는 문극겸의 묘소와 고간원지가 있다. 유구역에서 묵은 문극겸은 단평역을 거쳐 금강을 건너 남평으로 향했다. 문극겸의 충간을 무시하고 듣지 않던 의종은 결국 얼마 안 있어 무신 정중부의 난으로 왕위에서 비참하게 쫓겨났으니 곧 무신정권 100년의 시작이다.

또한 고려 말기에는 공주사람 이존오(李存吾, 1341-1371)가 임금에게 충간을 한 간관으로 이름이 우뚝하다. 그는 1366년(공민왕 15)에 임금의 과실을 간언하고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우정언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다.

공민왕은 친원파 권문세족을 쳐내려 신돈이라는 개혁적 승려를 기용해 기득권층을 제압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신돈은 권문세족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해 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켰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신진사대부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그가 권력에 취해 승려의 신분으로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자 도덕성과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렇게 신돈이 권력을 노골적으로 남용하는데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존오는 희생을 각오하고 신돈의 잘못을 논죄했다.

“신돈이 재상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아 있으니, 나라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해괴히 여겨 인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위아래를 구분하는 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군신관계와 부자관계와 나라와 집의 관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신돈은 국정을 전횡하며 아예 임금의 존재를 안중에 두지 않습니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말을 탄 채 홍문을 출입하며, 전하와 함께 의자에 기대어 앉곤 합니다. 적임이 아닌 자를 재상으로 삼아 천하의 비웃음을 받고 후대에까지 비난받을까 우려되어 간관의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격노한 공민왕은 이존오의 상소문을 불태우게 한 후 그를 감옥에 가두고 논죄할 것을 명했다. 목은 이색의 적극 변호에 힘입어 죽음을 모면했지만 결국 이존오는 전라도 장사(고창)로 좌천되었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이존오가 남긴 시조다. 간신(구름)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있음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그는 고향인 공주목의 석탄에서 은거하다가 “신돈이 아직도 기세등등하단 말인가?

신돈이 죽어야 나도 죽을 수 있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31세에 세상을 떴다. 이존오의 말을 제때 듣지 않던 공민왕은 이존오가 죽은 뒤에야 신돈을 처형했다. 이존오는 16세기부터 공암의 충현서원에 배향되어 역사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옛 왕조시대에는 왕에게 충간하는 직위를 두어 그릇된 통치행위를 바로잡게 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는 국회(입법부)와 법원(사법부)를 두어 대통령(행정부)을 체계적으로 견제하게 하고 있다.

행정부 내에도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같은 감시기구들을 두었다. 하지만 이번 국정 농단 사태를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제4부’라고 일컫는 언론도 자본과 대통령권력의 압력 밑에서 한없이 짜부라져, 급기야 국민들이 직접 일어서 바로잡게 되었다. 연인원 8백여 만 명이 두 달 동안 광화문 일대를 누빈 결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이것을 두고 ‘한국형 명예혁명’이라고 높이 평가하기에 앞서,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우리나라 민주공화국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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