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자라고 십여 년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와 보니 우리 공주의 숨은 가치가 점점 더 드러납니다.

70년대의 무령왕릉의 발굴을 시작으로 새로운 웅진 백제에 대한 관심사가 증폭되었고 꾸준히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하는 백제문화제를 통하여 문화강국으로서의 백제의 면모가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많은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몇 가지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제안을 합니다.

1.근자 들어서 나는 몇 분의 공주문화와 관련한 학자와 향토사학을 연구한 분들에게 물었습니다.

공산성이 있는 산 이름이 무엇인가요. 글쎄요. 생각을 안 해 봐서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그분들의 솔직한 대답이므로 탓할 일이 아니고 왜 우리가 공산성이 있는 산 이름을 잊고 살았는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산 이름을 이름답게 불러 주어야 한다는 차원의 말입니다.

나도 그저 공산성이라 부르거나 쌍수산성 내지는 산성공원이라 부르는데 심각한 잘못을 느끼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우연히 공산성이 있는 산 이름이 따로 없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공산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공산성이 있는 산 이름이 바로 공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공산에 성을 쌓아 공산성 무성산에 성을 쌓아 무성산성 부소산에 성을 쌓아 부소산성 정도는 누구나 생각하면서 정작 공산성이라는 산성 앞의 공자만 생각해서는 공산이라는 이름을 거의 잊고 살아 온 것입니다.

공산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지나며 만들어진 공주군지와 공산지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나는 차제에 공산의 이름을 찾아 불러 주고 ‘공산 입구에 이곳 공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산에 있는 백제의 왕성과 산성을 보시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공산과 공산성의 가치를 자세히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입석 간판 하나 정도는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두 번째 바람은 대통사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발굴 학자들 대부분은 대통사지 당간지주가 어디선가 옮겨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대통사지가 가루베지온에 의해 획정한 구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을 파 보았을 때 이렇다 할 석물 등 유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대통사지는 아마도 지금의 반죽동과 봉황동 언저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왕궁이 공산에 있었다 한다면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훗날 백제가 멸망 한 후 조선에 와서야 충청도 수부로서의 충청감영이 공산과 봉황산록을 오가면서 지어 지면서 여러 건물에 사용된 석물과 주추 등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백제시대 대통사지 주변에 널 부러져 있는 주초석등을 가져다가 감영 건물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고 누군가의 조사 기록에는 감영 건물이 지금의 사대부고 자리에 짓기 전에 대통사 당간지주가 있는 자리에 지어졌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건축물 축조에 이미 다듬어져 있는 도심의 석물들을 이리저리 옮겨서 건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하기에 대통사지에 있던 두개의 석주와 대통사명 와당 그리고 안승주 교수가 발굴한 불두 등이 그 증거가 되고 김갑순에 의해 발굴되어 세워졌던 석불상 등이 지금의 당간지주 주변으로 대통사지가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거기에 대통다리라는 지명 역시 강력한 대통사지로서의 지역을 획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통사지 주변을 사들여서 공원화하는 공주시에 대고 수차례 대통사지 관련 유물관을 건립하자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야만 백제의 국찰인 대통사지를 한번 지나가는 자리가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대답이 없는 상태로 무심한 시간만 제민천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바람은 5왕 추모관을 짓고 5왕 추모제를 모시자는 것입니다.

성왕은 60여년 사는 동안 공주에서 45년을 살았고 부여에서 16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30여세에 왕이 되고 재위 15년간 공주에서 무령왕릉을 축조하고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백제 중흥의 문화 창달을 위한 기반을 닦는 동시에 사비부여에 천도해 나갈 왕성을 구축하는 등 새로운 왕도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비 시대를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비부여의 역사는 웅진공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고 일상적으로는 보통 5왕 64년간의 공주 재위를 말하다가 성왕의 15년 재위를 떼어 내고 4왕 추모만 이야기하다 보니 64년에서 15년이라는 성왕의 치적이 공주에서는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셈입니다.

왕릉에 추모관을 짓는다 하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성왕을 포함하여 오왕의 신위 내지는 시조인 온조왕을 추가한다면 6왕의 신위가 모셔져야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공주의 미래를 발전 지향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분들의 좋은 의견을 바랍니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