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 풀꽃마을 김현태 촌장의 귀향기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큰 포목상을 30여 년을 운영하다 고향인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 풀꽃마을에 돌아와 둥지를 튼지 11년째인 유당(燸堂) 김현태(金賢泰 84)씨와 국화꽃향기가 가득한 날, 차 한잔의 시간을 가졌다.

▲ 의당 풀꽃마을 김현태 촌장

김현태 촌장은 의당면 율정리가 고향이다. 선친이 의당면 유계리에서 태어났다. 김 촌장은 공주시내에서 출생, 6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린 시절 경기도, 천안 등지를 돌아다녔다.

6·25가 터지자 어릴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난 소년 김현태는 당시 제대로 학교를 다니기에도 형편이 어려워 공주로 피난와 영명중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거의 그랬지만 그도 의당 청룡리에서 공주시내 영명중학교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이때 등하굣길에 보았던 공주의 산천이 그의 가슴과 망막에 깊숙이 자리잡는다. 아마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의 귀향을 결심하게 된 것도 그의 망막에 남았던 ‘공주의 산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보통고시라는게 있었어요. 영어는 백지를 낼 만큼 자신이 없었고 또래 친구들보다 3살이나 많으니 월반을 하기 위해서 고교때부터 독학을 했죠. 그리고 동인지 ‘창공’을 만들어 교우들과 활동을 했는데 이 ‘창공’ 제호는 내가 생각해 낸거예요”라며 잠시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김 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25세 군대 제대 후 서울로 상경한 청년 김현태는 1961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 사재청(현 국세청)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공무원들의 부패에 실망한 그는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 무모하게(?)사표를 던진다. 청렴했던 그에게 혼탁했던 당시 상황과 삶의 현실과의 괴리에서 느꼈던 고민을 ‘재무지’에 기고하기도 할만큼 그는 열혈 청년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 그가 섬유업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소속 세무서에서 동대문시장으로 파견근무 당시 상인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직물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넓은 안목과 친화력, 그리고 성실한 그는 곧 직물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당시 마직 와이셔츠를 개발,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섬유업계를 선점한 그는 원진레이온과 개인거래를 트는 등 섬유업계의 메카인 경북 대구쪽과의 인맥도 확대한다.     

그는 “포목상인들의 모임도 ‘백목회(白木會)’라 짓고 이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연 1회 명사들을 초청, 특강을 열기도 했어요. 연세대 김형석·김동길 교수, 나웅배 전 건설부장관, 도자기 명인 청파 이은구 등 25년간 100여명의 명사를 모시고 한국의 미래와 발전에 대해 토론도 했다”고 한다.

애기를 나누다 보면 상당히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정당가입은 한 적이 없고 다만 서울 아이즈맨클럽 활동, 이종찬 대표의 초청을 받아 상동교회 10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긴 했다고. 또 1980년대 초 동교동 DJ(김대중)와 독대, 5·18광주사태 주모자 가족이 명동성당에서 철야농성할 때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 중재역할을 하기도 했었다”며 은근히 본인 자랑도 털어 놓는다.  

그는 11년 전인 2006년 고향에 내려와 제2의 인생의 꿈을 펼치고 있다. 영명장학재단 이사장과 영명학교 총동창회장을 거쳐 현재 영명학교 총동문회 고문으로 활동중인 그는 풀꽃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세우는 꿈을 갖고 있다.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가 되었으니 두 곳을 잇는 산책로가 하루속히 해결될 것”이라면서 "앞으로의 여생을 공주를 위해 공주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공주를 위해 살 것"이라고 밝혔다.

풀꽃마을(현재 8집)에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한다고. 그리하여 이웃과의 소통의 부재를 털고 풀꽃처럼 담백하게 살기를 그는 희망하고 있다. 소통을 원하는 이웃은 전화 010-2710-8918 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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