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금동보살입상 도난에 “돌아온다” 믿어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백제 역사만이 아니라 ‘역사도시 공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한 확기적 계기였다.

고고학적으로는 지금과는 여건이 전혀 달랐던 현장조사의 ‘초기시대’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주의 발굴 작업 현장의 일선에 있었던 이해준(공주대 사학과) 교수가 당시의 발굴 조사 이야기 보따리를 3월 19일 공주학연구원에서 개최된 백제포럼 특강에서 풀어 놓았다.

무령왕릉 발굴, 48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준 교수

1971년 당시 대학 2년생이었던 이해준 교수가 안승주 교수(전 공주대 총장)로부터 무령왕릉 발굴 소식을 들었던 날은 7월 7일. 왕의 릉을 파헤치니 하늘이 노했다라는 얘기가 나올만큼 저녁부터 장대같은 빗줄기가 관계자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당시는 어느 누구도 처녀분인 그 고분이 1500년 만에 얼굴을 드러낸 ‘무령왕릉’임을 알지도 못했다. 

“6월 29일 배수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7월 5일에 전돌이 발견되면서 연도 폐쇄부가 들어 났다. 소식을 접한 국립박물관은 긴급조사단(김원룡, 장인기, 조유전, 지건길, 손병헌)을 구성하고 7월 7일 16시에 현장에 도착, 공주의 연구자 김영배 관장님, 안승주·박용진 교수님과 합류하여 발굴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날 폭우가 내렸고 이튿날인 7월 8일 아침부터 굴착작업이 실시되는데 연도 폐쇄부가 강회다짐이어 굴착에 시간이 많이 걸려 오후 4시에야 연도 앞에서 제사를 올리고 발굴을 시작할 수 있었다. 7월 8일 밤 8시경 시작된 발굴은 사진과 실측 작업을 한 뒤 10시부터 밤생 조사를 거쳐 7월 9일 아침 9시 경에는 유물 수습이 완료되었다.”

이해준 교수가 그린 무령왕릉 실측도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은 마치 수사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는 대목이다.

당시 이해준 대학생은 말단 심부름꾼(?)으로 2차 발굴 때부터 합류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그림실력(처음 미술대를 지망했었다고 함) 때문이었다고. 무령왕릉의 전체 구조와 축성법을 조사 실측하는 기초조사는 7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3개월이 걸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 조사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였다. 후일 안승주 교수님은 ‘아마도 무령왕릉에 가장 오래 들어가 있던 사람은 자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준 교수는 말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사진. 오른쪽 등을 보이고 키가 큰 사람이 이해준 대학생

중학동 소재 공주박물관 당시 도난당했다 며칠만에 돌아온 의당 송정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좌)과 이해준 교수의 실측도(우) 


신관에서 하숙을 하던 이해준 대학생은 새벽 6시에 걸어서 시어골로 가서 인부들의 밥을 하고, 키가 커서 왕릉 안 아치부와 벽돌 사이로 뻗어내린 나무뿌리를 뽑는 일 등 궂은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공주 의당 송정리 출토 금동보살입상(국보 247호)이 도난당하자 당시 이 교수는 “이 금동불이 반드시 돌아 올 것을 믿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발굴 현장에서 발견자인 전도사가 점쟁이 아들에게 금동불을 주었는데 이 금동불을 욕심내서 며칠 갖고 있었더니 가슴이 뛰고 자꾸 몸이 아파서 할수 없이 신고하고 불상을 내놓았다한다. 그때 이 금동불은 정말 며칠만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이해준 교수의 발굴 이야기 보따리는 끝이 없는데 약속된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참석자들은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이해준 교수 특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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