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는 조선통신사, 백제통신사가 있다

지난 2017년 10월 김이교의 ‘신미통신일록’을 비롯한 조선통신사 관련 총 111건 333점의 기록물(한국 63건 124점, 일본 48건 209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공주는 백제역사유적지구(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조선통신사 관련 세계기록유산, 그리고 6월 30일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마곡사를 비롯한 7개 전통사찰)’등 세 유형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이 기록유산 가운데는 공주 인물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의‘일동장유가’와 죽당 신유(申濡)의 ‘해사록(海錄)’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세계기록유산은 한국과 일본 양국이 공동으로 등재를 추진한 점과 민간 단체가 주도하여 성사시킨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지난 5월 조선통신사 충남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공주의 인물인 이삼평에 이어 김인겸을 재조명하여 조선통신사를 콘텐츠화하여 공주문화발전을 도모하자는데 뜻을 두었다.

첫 번째 발걸음으로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박4일간의 여정으로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 시즈오카현(縣)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회장 정영일)가 주최하고 조선통신사충남연구회(회장 윤용혁)가 주관한 이번 답사에는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와 조선통신사충남연구회 회원 8명(회장 윤용혁, 회원 정영일, 최경자, 정용서, 김재숙, 나정희, 김태순, 신용희)이 참여했다.

이번 여행은 조선통신사 유적지 답사와 시즈오카현 현청 방문, 그리고 시민단체와의 교류에 목적을 두었다.

조선통신사가 한양을 떠나 부상항을 거쳐 일본 에도까지의 여정을 그린 지도

1. 조선통신사 유적지를 찾아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조선통신사 -

시즈오카는 일본의 상징 후지산이 있는 지역으로 전국시대의 무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도시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1592~1598)으로 단절된 조선왕국과 일본의 국교회복을 위해 조선통신사를 실현시켰으며 내란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를 끝내고, 평화로운 에도시대(1603~1867)를 열었다.

도쿠가와가 머물렀던 슨푸성. 지금은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슨푸공원의 도쿠가와 동상. 매를 들고 있는 것은 사냥을 좋아했다고 한다

도쿠가와는 8~14세의 어린 나이에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시)에서 12년간 인질로 보냈으며 29~45세에는 시즈오카의 하마마쓰성에서 시련의 시대를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나가 있던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고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초청했다. 이때 ‘통신(通信)’은 ‘양국이 신의를 가지고 서로 교류한다’는 뜻을 가졌다.

일본 중부지방에 위치한 시즈오카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릴적 인질로 잡혀 있던 슨푸성(駿府城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에는 도쿠가와의 동상을 비롯한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도쿠가와는 66세에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 75세까지 시즈오카에서 보냈으며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이번 답사길의 시즈오카 지역의 조선통신사 관련 사찰과 유적

-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정신, 조선통신사와 시즈오카 -

통신사 기록물은 1607년(선조 10)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조선이 에도막부의 초청으로 12차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와 관련한 자료를 말한다. 또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한 조선과 일본이 평화를 구축해 나간 역사 경험과 지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존중한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정신을 품고 있다.

통신사(通信使)는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양국이 평화를 유지해 나가는데 크게 공헌했다. 통신사 왕래로 조선과 일본은 증오와 오해를 풀고 상호 이해를 확대할 수 있었고 외교, 학문, 문화예술,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교류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戶)까지는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km의 여정이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 받아 당시 일본 지배층은 물론 서민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통신사 전문가인 기타무라 긴야 선생의 설명에 감명을 받았다

- 기타무라와 시즈오카 사찰의 현판 -

이번 답사에서 시즈오카縣의 현조선통신사연구회 사무국장 기타무라 긴야(北村 欽也)선생의 안내와 설명을 받았는데 기타무라 선생은 조선통신사 전문가로 알려지지 않은 시골 사찰의 현판을 일일이 설명해 주어 일행을 놀라움과 함께 기쁘게 했다.  ‘조선통신사’라면 먼저 김인겸의 시와 주련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이겐지(淸見寺)를 떠 올렸기 때문이었다.

기타무라 선생은 “세이겐지(淸見寺) 외에도 시골 사찰에 조선통신사 관련 현판을 비롯한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먼저 중보산(中寶山) 광증선사(光增禪寺)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곳에서부터 우리가 감동한 것은 ‘中寶山’ 현판을 1711년 조선통신사 사우관(寫宇官)으로 갔던 화암(花庵) 이이방(李爾芳)이 쓴 것으로 현판 왼쪽에는 ‘花庵’ 낙관이 새겨져 있었다.

화암(花庵) 이이방(李爾芳)이 쓴 것으로 현판 왼쪽에는 ‘花庵’ 낙관이 새겨져 있다.

‘朝鮮國東巖’ 낙관의  1748년 동암(東巖) 현무구(玄文龜) 寫宇官이 새긴 현판

光增禪寺를 시작으로 만상사(萬象寺)의 1682년 설월당(雪月堂) 이삼석(李三錫)이 쓴 ‘萬象寺 현판’과 우란사(牛欄寺) 현판, 원상사(常圓寺)의 법성산(法城山) 현판에는 ‘朝鮮國東巖’이라는 낙관으로 보아 1748년 동암(東巖) 현무구(玄文龜) 寫宇官이 새긴 글씨였다.

이외 1748년 해안암(海岸菴)에는 자봉(紫峯) 김천수(金天秀) 寫宇官이 새긴 ‘海岸菴’ 현판을 보았다. 또 2007년 한일관계와 세계평화를 위해 ‘통신사 평화상야등’을 건립한 호타이지(寶泰寺)와 가마쿠라시대에 무신정권의 수장 쇼군 겐지(源氏)의 일족의 흥망의 무대가 되었던 수젠지(修禪寺)도  방문했다.                                                

호타이지(寶泰寺)

 

     
     호타이지(寶泰寺)에 있는 통신사 평화상야등

슈젠지(修

기타무라 선생은 시골 사찰에까지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에 “당시 일본의 시골 사찰에까지 조선통신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현판 제작에는 시골의 농부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제작했다”며 “조선통신사의 글을 받기 위해 여러날을 걸어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글을 받은 사람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조선통신사 행렬 중 말위에서 재주 부리는 마상재는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부산조선통신사역사관의 모형도 

시즈오카의 '조선통신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세이겐지(淸見寺)

- 세이겐지와 김인겸 -

드디어 시즈오카의 ‘조선통신사 박물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조선통신사의 시전(詩箋), 현판(懸板), 편액(扁額), 회화(繪畵) 등 유물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세이겐지(淸見寺)에 도착했다.

에도시대 조선통신사가 시즈오카를 지나간 것은 10회로 세이켄지(淸見寺)에서 숙박한 것은 1607년과 1624년 두차례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사찰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 세이켄지가 에도시대에 조선통신사의 접대장소로 지정되어 절에 들른 통신사가 휘호(揮毫)한 현판과 시와 글이 남아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에서 본 풍광이 빼어난 절경이기 때문에 시인이나 묵객이 이곳에 묵으면서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했다. 

또 산 허리를 깎아 내서 길을 낸 도카이도(東海道 세이켄지를 지나 에도로 가는 삿타고개는 바다와 인접한 벼랑 험한 곳으로 이 고개를 통신사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1655년 산허리를 절개하여 도쿠가와 막부가 도로를 개설했는데 이 왕복길을 ‘도카이도’라 한다) 넘어 해안의 절경과 도쿠가와의 환대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세이겐지 입구 문의 '동해명구' 현판.  금곡(錦谷) 현덕윤(玄德潤)의 글씨다


일본 가마꾼이 조선통신사 정사를 태운 행렬도

절 입구에는 동해명구(東海名區)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1711년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왜학역관의 표상 금곡(錦谷) 현덕윤(玄德潤)의 글씨다. 절의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바다와 시미즈(三島)항이 내려다 보이는데, 시미즈항은 일본의 3대 미항 중 하나로 날이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에 있는 후지산의 설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세이켄지(淸見寺) 본당에서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통신사로 세이켄지를 찾아왔던 여우길, 정호관의 詩가 목판에 새겨져 본당 안에 걸려 있다. 1764년 수행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화원 김유성의 금강산도, 낙산사도 세이켄지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인겸의 시와 주련 찾기에 마음이 급한 우리의 기대를 모르는 기타무라 선생의 열띤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먼저 사찰 기둥의 주련 글씨를 찾았을 때의 반가움이란... 이 역시 동향(同鄕)의 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세이켄지가 소장한 김인겸의 시 3편 편액은 보지 못했지만 주련의 글씨를 확인한 것만 해도 이번 답사가 성공적이었다고 하고 싶다.

세이겐지의 조선통신사 관련 시, 휘호 등의 편액

세이겐지 주련의 김인겸 글씨를 가리키는 윤용혁 교수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은 1707(숙종 33)∼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이다. 김상헌(金尙憲)의 현손, 아버지는 통덕랑(通德) 김창복(金昌復),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장서주(張瑞周)의 딸이다.

문벌이 혁혁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수능(壽能)은 서출이라 과거에 급제하고도 현감에 그쳤다. 14세 때에 아버지를 사별하고 47세 때인 1753년(영조 29)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57세 때인 1763년에는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종사관인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통신사 조엄(趙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그뒤 지평현감(砥平縣監)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동사록(東錄)』이 있다.

김인겸의 시

김인겸의 시

김인겸의 시

- 조선통신사 신유와 해사록 -

죽당 신유(申濡)는 1643년 조선통신사 종사(從使)로 일본에 갔다. 그의 기록물은 시문(詩文) 1점(岡山縣 本蓮寺 소장)과 기행문 해사록(海錄)이 서울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공주시 이인면 달산리에 후손(신원호)이 거주하면서 최근 신도비를 건립했다.

공주시 이인면 달산리의 신유 묘와 비석

2. 조선통신사와 한 일 민간 교류

이번 답사의 또 하나의 목적은 한 일 민간교류에 두었다. 이번 답사에서 지난 9월 12일 시즈오카縣 가와카쓰 헤이타(川勝 平太) 지사가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방문하였을때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의 환영에 “백제 후예들의 따뜻한 환영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때 수행원으로 온 시즈오카縣 지역외교국  카네시마 에이이치(影島 英一郞)참사와 고지연(시즈오카현 지역외교과) 전문관과는 구면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안내를 받아 순로로운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시즈오카현을 방문한 일행과 시즈오카현 관계자, 그리고 시민단체간의 교류 행사

시즈오카현 방문 기념 촬영

답사 다음날인 10월 23일 오후 5시30분 방문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시즈오카縣 직원들의 따뜻한 미소와 환영 인사가 긴장한 우리의 마음을 완화시켜주었다. 형식적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환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즈오카縣廳 방문(가와카쓰 지사는 다른 일정으로 만나지 못함)이 처음임에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조선통신사’로 이어진 성신교린 영향이었을까?

시즈오카縣의 하세가와 다쿠 지역외교국장을 비롯한 도무라 과장과 가게시마 참사, 구리타 대리와 고지연 전문관 등이 참석했고, 민간단체에서는 ‘시즈오카에 문화의 바람을’ 사토 회장과 고바야시 사무국장, NPO AYU드림의 아메미야 회장과 고이즈미 이사, 현조선통신사연구회 아마노 회장과 같이 답사에 참여한 현조선통신사연구회 기타무라 사무국장 등 9명이 참석했다.

양측의 인사와 간단한 선물 교환이 끝나고 이어진 저녁 만찬에서 양측은 같이 노래를 부르는 등 금방 친밀한 관계로 발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들의 단체 결성과 시즈오카縣의 행정적인 지원 등을 상세하게 얘기해 주면서 조선통신사의 고장 공주에서 시즈오카를 찾은 우리를 반가워하면서 언젠가 공주를 방문하고 싶다는 희망을 비추기도 했다.

시주오카의  '시즈오카에 문화의 바람을' 민간단체와 교류 시간을 가졌다

특히 2007년 5월 시즈오카에서는 ‘조선통신사 400주년기념사업 조선통신사재현행렬’이 개최돼 2일간 600명의 사람들이 참가해 ‘선린우호’의 정신을 지금에 전했다고 한다.

현재는 10월에 조선통신사 기념사업을 개최하고 있다.  ‘시즈오카에 문화의 바람을’ 사토 회장은 다음날에도 우리 일행과 함께 답사에 나서 유적지를 설명해 주면서 한국의 공주와 시즈오카가 새로운 ‘성신교린’의 관계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처럼 시즈오카에는 조선통신사 관련 민간단체가 서로 연계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목포에서 진행된 조선통신사선 진수식 포스터

3. 목포와 부산의 조선통신사 관련 행사

- 조선통신사선 진수식과 부산박물관 전시 -

답사를 마친 다음날인 10월 26일 목포에서는 한 일 성신교린의 역사적 상징물인 조선통신사선 진수식이 있었다. 우리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KTX에 몸을 싣고 목포로 향했다.

문화재청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주최, 주관한 이 행사는 17∼19세기 200여 년간에 결쳐 한 일 양국 대외교류에 사용된 조선통신사선 재현으로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주년을 기념하고 조선통신사 정사기선을 재조명하는 특별한 행사였다.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장면

조선통신사선 진수식에서 일본의 무용단이 '한일우호' 깃발을 흔들며 공연하는 장면 

당시 조선통신사선을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제작, 이날 진수식에 이어 참가자들이 승선하며 목포 앞바다를 운항했다.

조선통신사선 진수식에 참석한 조선통신사충남연구회(좌로부터 한이순, 신용희, 신정순, 문경호, 나정희)

또 부산박물관에서는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25일부터 11월 25일까지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한국에 소재한 43점, 일본에 소재한 72점)이 전시되었다.

이 기록물은 외교기록, 여정기록, 문화교류기록으로 구성되어 있어 통신사의 전모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공존과 평화, 우호와 협력의 결과물인 통신사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아 그 가치를 확신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공유하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자 의의이다.

부산박물관에 전시된 조선통신사 행렬도

김이교와 일행 334인은 1811년에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마지막 통신사였다. 당시 김이교는 2월 12일 한양을 출발해 5월 22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源忠岡) 등 일본측 사절단에 국서(國書)와 함께 공사예단(公私禮單 공적 혹은 사적으로 주는 외교상의 예물 명단)을 전달하였다.

신미통신일록

마지막 조선통신사 김이교 정사의 호패와 인장

이곳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김이교(金履喬) 초상을 비롯한 신미통신일록과 인장, 호패, 교지, 교서 등 20여점을 포함하여 김인겸 시 1편이 전시되어 공주인으로써 자부심을 갖고 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4. 공주의 조선통신사 콘텐츠 개발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요즘도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는 그리 매끄럽지 못한 편이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으로 함께 가야할 지리적 운명을 지닌 양국이다.

500여 년 전 임진왜란 등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현실이자 마음의 응어리이다. 그러나 이 갈등은 양국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한일 양국의 2000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보낸 것은 약탈과 전쟁의 시대에서 벗어나 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500여 년에 걸쳐 양국을 오간 조선통신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공주는 백제시대부터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1500년 전부터 백제는 ‘백제통신사’를 일본에 보내 교류를 해 온 것이었다. 하여 이번 답사의 주제를 ‘조선통신사, 백제통신사’로 정했다.
 
조선통신사가 배를 띄우기 전 무사안녕을 비는 해신제를 지냈던 부산은 2009년 1월 부산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일본과 함께 지난해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기여한 민간단체이다.

이에 비하여 공주는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가진 도시임에도 ‘김인겸’이나 ‘신유’, ‘김이교’ 등의 인물을 재조명하거나 연구하는 시민이나 민간단체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무릉동 선산의 김인겸의 묘역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묘를 찾기가 어렵고 안내판 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금강변 김인겸 가비(歌碑)도 차량이 스쳐가는 금강교 옆에 위치해 갈수록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공주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구석기시대부터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인지 내 안의 보물을 미처 알아채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지난 11월 8일 2018 공주대 문화유산대학원 명사초청에 나선 심규선 서울대 교수는 공주가 조선통신사를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면 “①주민과 단체, 행정기관, 학계 등을 통한 필요성 전파로 합의를 얻는다. ②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③이익만을 위한 접근은 피한다. ④중장기 계획을 세운다. ⑤콘트롤타워를 만든다. ⑥연구, 기념, 이벤트를 적절히 안배한다. ⑦네트워크를 형성한다. ⑧행정기관의 관심이 절대적이다.(예산없이는 브랜드도 없다)”라고 강조하여 공감을 얻었다. 

조선통신사충남연구회 윤용혁 회장은 “고대역사 한일민간교류의 네트워크 주제가 ‘무령왕’이라면 조선시대 한일교류 네트워크 주제는 ‘조선통신사’”라며 “김이교를 비롯한 퇴석 김인겸과 죽당 신유의 인물 조명과 콘텐츠개발이 시급하다”면서 ‘김인겸 공원’을 건설, 금강변에 있는 김인겸 가비(歌碑)를 옮겨 공주시민들에게 김인겸을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번 3박4일의 조선통신사 시즈오카 답사가 ‘코끼리 다리 만지다 온 답사’일 수도 있다. 첫술에 배부르랴! 하지만 늦었다고 손을 놓기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으니 공주에 ‘조선통신사 바람’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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