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이란 우리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것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국보급 유물에서부터 지방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조상들의 삶의 단면과 정신적인 흔적을 보면서 오늘을 재조명하면서 보다 나는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손들에게 문화유산을 물려주어야하는 이유이다..

○고마나루터(熊津)

△고마나루터 1 - 1997년
고마나루는 2006년 명승 제21호로 지정된 곳으로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썼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시원(始原)이자 상징이며 나무꾼과 곰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고마나루터 2 – 2017. 2. 27
백제 웅진시대에는 백제의 관문으로 중국, 일본, 고구려 등과의 문물을 교역하던 국제 항구로 이용되었던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고려 현종(1010)과 조선 인조(1624)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에 들어왔다. 공주시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현종 공주 방문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3월 한옥마을 입구에 현종·인조 기념비를 세웠다. 

20년 후의 고마나루는 솔밭은 여전한데 4대강 사업으로 모래사장이 보이지 않고 연미산 나무가 자란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웅진단터(熊津壇址)

△웅진단터 1 – 2009. 11. 2
고마나루의 한편에 솔밭과 어우러진 웅진단은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은 백제시대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주관으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이다. 웅진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웅진사(熊津祠), 웅진단(熊津壇), 웅진제소(熊津祭所)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웅진단터 2 – 2012. 7. 7
웅진단터 사진 1에서 보였던 자작나무들이 보이지 않는다. 공주시에서 벌목한 것 같은데 왜 나무를 베었을까?

△웅진단터 3 – 2015. 4. 5
2011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시대 기와건물지 1동과 담장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제사에 이용되었던 분청·백자제기와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왼쪽 소나무 아래 발굴 당시 건물지에서 나온 기와 파편이 보인다.

이 기사는 공주문화원에서 발간한 ‘공주문화’에 실린 원고입니다.(325호 2017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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