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에 김황원(金黃元)이 대동강변 부벽루에 올랐다. 부벽루 현판에는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평양 산천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있었다.

그러나 김황원은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다 태워버린 뒤 자기가 멋진 시를 지어 걸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종일토록 부벽루의 난간에 기대어 시상을 떠올리고자 애를 썼으나, 그 아름다운 경치를 도저히 글로 옮길 수가 없었다.

해질 무렵에야 겨우 두 구절을 생각해 냈을 뿐, 끝내 시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김황원은 부벽루에서 통곡을 하다가 그냥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이 부벽루에서 완성하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두 구절로 된 시는 다음과 같거니와, 다 마쳤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긴 성벽 한켠으로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들 동녘 끝으로 아스라한 산, 산이여(大野東頭點點山)

결과적으로, 김황원은 부벽루의 시정(詩情)을 완성된 시로 형상화하지 못했으며, 본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형태상으로 보아 두줄시를 짓고 만 셈이 되었다. 김황원의 미완성 시를 보면서 두줄시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정확하게 두줄시의 기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두줄로 된 대련(對聯) 형식의 시는 김황원 이전이나 이후에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미완성으로 끝난 김황원의 부벽루 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두줄시의 개념적 범주를 토대로 한다면, 이 시를 두줄시의 원조격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우선, 두줄시는 미완성 시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미완성으로서의 시적 감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이불발(引而不發)하는 맛이 없다면, 두줄시로서의 매력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리 표현력이 출중한 시인도 자신의 정서와 사념(思念)을 다 드러낼 수는 없다.

또한 시는 존재하는 사물의 언어적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언어라는 제한된 도구를 사용하는 만큼, 사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든 시 자체는 언어적 표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만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두줄시는 일반적인 시적 표현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와 함께 미완성 시라는 형태상의 한계까지 중첩하여 2중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두줄시는 의도 여하에 관계없이 화자(話者)가 다하지 못한 부분을 독자에게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줄시는 화자에게 극히 제한된 언어적 공간만을 허용하는 만큼, 촌철살인의 언어적 표현과 어휘 구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두줄시가 가지는 표현방식에서의 한계이다.

따라서, 두줄시는 미완성 시라는 2중적 제약과 함께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고 있다. 두줄시의 출산에는 3중의 고통이 뒤따르는 셈이다. 화자가 혼자만의 힘으로 3중의 제약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줄시는 화자와 독자가 함께 호흡할 수 있을 때, 생동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시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독자의 호흡을 기다리기만 하면 화자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설 자리가 없다. 화자의 정체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단 두 문장으로 자신의 시정을 드러내는 한편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 비율은 어느 정도가 좋을까? 어디까지가 화자의 영역이고, 독자의 몫일까? 그 황금비율은 무엇이며, 기준선은 어떤 것일까? 이렇게 보면, 두줄시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두줄시가 이렇게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면, 두줄시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두줄시가 유행(?)하게 된 바탕에는 기성의 시들이 난해하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의 호흡이 짧은 만큼, 웬만한 사람이면 쉽게 접근하고 친근해질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인 것이다. 두줄시는 그러한 매력을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런 매력이 없다면, 두줄시가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두줄시는 쉬워야 한다. 쉬운 방법으로 시적 감흥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김황원은 문장은 물론이고 탁월한 경륜과 인품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그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의 올바른 삶과 함께 평가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든 문장이든 그것이 우리 삶의 맥락 속에 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참된 삶과 유리된 것이라면,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시문이라 해도 좋은 글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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