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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대전간 ‘구길’의 역사를 찾아서
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2
2020년 03월 06일 (금) 11:35:26 공주학연구원 3777@kknews.co.kr

전국 곳곳에서 지역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지역(학)아카이브와 같은 기초자료 수집과 기반 연구를 앞다투어 실시하고 있는 요즈음, 전국적으로‘근현대 역사문화’가 각광을 받고 있다.

필자가 작업하고 있는 공주학아카이브 역시 일제강점기나 광복직후, 또는 공주시민들의 30-40년 전 이야기 등‘공주의 근현대 자료’에 초점을 두고 수집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변의 많은 지자체나 수집 기관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탐색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작년 11월 말경 이웃 도시 대전의 한 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소식에 눈이 멈췄었다. 일본 교토에 있는 한 대학교로부터 일제강점기 대전의 자료를 대여해 지난 2월 말까지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대여품 중에 낯익은 도면 1점이 보였다. 그것은 1911년부터 1913년 사이에 실시한 공주-대전 간 도로 개수공사 때 작성된 도면이었다. 이 도면은 2018년 필자가 소속된 공주학연구원에서도 공주학아카이브를 위해 수집한 것으로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공주학아카이브에서 수집한 공주대전간개수선로일람(公州大田間改修線路一覽)

1932년까지 충남도청이 있던 공주는 충남의 행정기능이 밀집된 곳으로, 그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당연히 공주를 중심으로 도로가 개선될 필요가 있었다. 경술국치 이전인 1907년부터 이미 공주에서는 본격적인 도로망이 개설되기 시작하여, 공주를 중심으로 논산, 천안, 조치원, 대전, 홍성, 부여 등을 잇는 소위 ‘신작로’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전국을 잇는 도로는 등급이 매겨져 있었는데, 중요도에 따라 1등도로, 2등도로, 3등도로가 있다. 지금의 고속도로, 지방도로 등과 같은 이치이다. 공주-대전간 이 도로는 2등도로로서 공주-논산간, 공주-천안간(소정리간), 공주-조치원간 도로들 보다 나중에 확충되었다.

신생도시였던 대전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호남선의 경부선 분기점으로 대전역이 결정되면서, 도시간 연결성이 보다 원활해져 돈 많은 유지나 일본인들이 점점 늘어나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와 대전을 잇는 교통로의 개선이 점차적으로 요구되었다. 마침내 1911년 3월 공주-대전간 도로 개수공사는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도면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이 도면의 정확한 이름은‘공주대전간개수선로일람(公州大田間改修線路一覽)’이다. 개수공사는 공주시가지 중심부에서 시작하여 장기대를 지나 금강의 남쪽 강변을 따라 창벽을 지난다. 이 구간은 공주사람들에게 공주에서 대전으로 가는‘구길’,‘구도로’로 기억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창벽에서 마티고개를 굽이굽이 지나 공암∼규암∼유성을 지나대전역까지 나타내었다. 도면 속에 주요지점을 표기하고 사이의 거리도 표기하였다.

특히, 도면 좌측 하단부에 도로공사 개요현황이 수록되어 있어 공사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현황에 따르면 개수공사의 기공식일이 1911년 3월 6일이며, 준공일은 1913년 6월 10일로 약 2년3개월의 공사기간을 나타내고 있다.

또 총 도로의 길이는 9리3정28간으로 약 37km정도 이다. 공사구간 내에 총 37개의 교량이 가설되고, 배수로(暗渠)와 배수관(土管) 등을 설치하였으며, 총 공사비는 일본돈 95,075엔 96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자세한 공사개요 현황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 도면은 공사 준공시기인 1913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공주학아카이브에서 수집한 공주대전간 개수도로공사 인민출역광경 엽서(종걸스님 대여)

이 도로의 개수공사와 관련해 몇 가지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변평섭의 『실록 충남반세기(1983년)』에 의하면 이 공사시행을 위해 충남도장관 박중양이 조선총독부에 여러 번 찾아가 교섭을 벌이고, 급기야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직접 만나 단판을 지은 끝에 공사비 87만원을 타냈다고 한다.

또 마티고개 중턱 공사에서는 다이너마이트를 잘못 터트려 화전민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안그래도 당시 도로개수를 위해 이 지역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화전민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이 사고까지 발생해 화전민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공사가 1개월 가량이나 중단되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도로 개수공사를 위해 도로 주변에 사는 공주와 대전사람들이 부역으로 차출되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이 도로공사를 위해 차출된 사람들의 노동 모습이 담겨 있다. 잘 갖춘 제복차림의 사람들이 관리자인지 순사인지 모르겠으나, 그들 사이에서 삽과 괭이를 들고 힘들게 일하는 부역민의 모습을 보면 씁쓸함이 느껴진다. 이들에게 과연 한 푼의 수고비나 임금이 주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공사가 끝나 1913년 10월 17일 공주의 산성공원(지금의 공산성)에서 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당시 개회장에는 공사관계자 및 충남도 평의원, 대전에서 온 학교조합관리자, 신문기자 및 공주유지 등 약 400명이 대거 모인 축제의 장이었다. 바야흐로 ‘해 뜨는 대전’으로 가는 이동시대를 알린 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곧 있을 ‘해 지는 공주’의 시대로 가는 연도(沿道)가 아니었을까.

   
▲ 공주대전간개수선로일람」도면 속 1913년경 「공주시가도」

이 도면에서 특히 주목 할 점은 또 하나가 있다.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 개수의 목적을 살려 두 도시의 시가도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특히 공주는 대전에 비해 원도심의 지도가 매우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지도기호로서 약식 표기된 이 시가도에서는 충남도청을 비롯한 공주군청, 지방법원, 경무부, 경찰서, 공주자혜의원, 우편국 등 관공시설과 공주공립보통학교, 농업학교, 심상소학교, 영명여학교와 같은 학교 등 주요시설을 정확하게 표기하였다.

특히, 좀처럼 쉽게 알 수 없었던 공주향옥의 위치가 제민천가에 정확하게 표기되어 공주 충청감영 역사에 또 하나의 보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의 교동인 금정(錦町)의 제민천 하류에 직사각형 부지의 공주외감옥(공주형무소의 전신)이 표기되어 있어, 감옥의 확장이전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1914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도면은 1913년경 도로 준공시의 도면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해주고 있다.

이처럼 공주대전간개수선로일람은 일제강점기 초기 공주의 주요시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역사적가치가 있으며, 앞으로의 활용이 매우 기대된다. 
 
(작성자 :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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