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3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려는 일이 원하지 않는 대로 진행될 때를 ‘머피의 법칙’이라 부른다면, 우연히 유리한 일만 거듭해서 일어날 때 쓰는 말로 ‘샐리의 법칙’이 있다.

일제강점기 공주읍의 일반현황을 담은 공주 자료 ‘공주읍세일반’이 필자에게는 그러하다. 필자는 일제강점기의 옛 자료들을 전문 판매인을 통해 수집하기도 하는데, 그들이 판매하는 신착 물건으로 ‘공주읍세일반’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부른 값은 혀를 차게 만들었다. 결국 구입을 포기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찰나, 필자는 남궁운 선생님의 보덕일지와 같은 기증자료 속에서 반가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공주읍세일반 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샐리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 1941년도 공주읍세일반(공주학연구원 소장)

1941년 공주읍의 통계를 담아

1941년도에 간행된 이 공주읍세일반은 공주읍에서 간행한 것으로, 공주읍의 행정, 인구, 산업, 교육 등 당대 공주읍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비록 공주군 전체가 아닌 공주읍만의 상황을 다룬 것이기는 하나, 공주의 행정중심소재지인 공주읍의 주요 핵심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총 54쪽의 분량에 가로 13cm, 세로 18cm로 손바닥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공주읍세일반은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전체 구성은 16장으로 제1장 위치, 제2장 지세, 제3장 연혁, 제4장 위치 및 면적, 제5장 기후, 제6장 호구, 제7장 읍, 제8장 관공서학교단체, 제9장 읍재정, 제10장 읍영사업, 제11장 종교, 제12장 사회사업, 제13장 위생, 제14장 산업, 제15장 상공업, 제16장 금융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두에는 공산성 옆 벚꽃터널을 비롯하여 충남도청 선화당 건물을 활용한 공주박물관, 금강철교, 공주고등여학교 등 공주의 명소를 담은 사진이 수록되었고, 부록으로 공주고적명승편이 수록되어 마무리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1년 읍세일반이 간행되었던 당대에는 본정이 1-2구역으로 나뉘어져 다시 11개정 체제로 운영되었다.

당시 공주읍은 총 3,005세대이며, 인구는 15,434명으로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했을 때 이미 일시에 2천 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대전으로 빠져나갔지만, 조선인의 수가 늘면서 점차적으로 인구가 늘어 갔다.

그 중 공주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은 총1,278명으로, 세대주의 직업을 조사해 본 결과 역시 관공서의 공무직이나 자유업에 종사한 사람이 절반이상을 차지하였다.  

또한, 읍세일반에서는 당시 공주의 주요산업과 상·공업 현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상공업의 경우 총 23개 업종별 호수와 생산 수량, 그리고 당시의 가격까지 기록되어 있어 1940년대 공주의 경제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작금의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19와 연관지어 보면, 제13장 위생편에서 도립공주의원 현황 이외에도 전염병 발생현황과 천연두 예방접종자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할 만하다.

경술국치 이후 늘어난 외지인과 낙후된 의료시설 탓에 전국의 전염병 질환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 유행하였고, 그 이후 충남의 유일한 공공의료기관이었던 공주자혜의원에서는 1923년에 전염병동을 별도로 설치하는 등 전염병 관리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1941년 읍세일반에서는 당시 전염병 발생 현황을 이질(赤痢), 장티푸스(腸チブス), 디프테리아(チフテリヤ), 파라티푸스(パラチフス), 발진티푸스(発疹チフス), 성홍열(猩紅熱) 6종으로 나누어 환자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으나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전염병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59.08.08. 제2대 공주읍의회 의원일동(공주학연구원 소장)

공주읍의 승격과 운영

공주읍세일반은 말 그대로 충청남도 공주읍의 일반현황을 총망라하여 담은 읍지서이다. 그렇다면 공주읍은 언제부터 편성된 것일까. 경술국치 이후 전국에서는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재편에 따라 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이때 공주는 6개 정(町)으로 크게 나뉘었는데, 18개면에서 공주면을 비롯하여 총 13개면이 되고, 167개리를 인근의 대전, 연기, 부여 등에 이관하여 207개 리(里)로 행정구역의 대폭적인 축소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각 면에는 면장 1인과 서기 5-6인이 배치되어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러다 1931년 4월 1일 충남도청 소재지로서 공주군의 각종 행정기관이 즐비하여 타 지역에 비해 발달하고 인구 수가 많았던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되어, 바야흐로 공주읍시대가 되었다.

이듬해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는 아픔으로 각종 관공서와 사람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빠지는 현상이 발생했지만, 점차 공주읍의 그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938년 10월 주외면의 금성리, 금학리, 옥룡리, 용당리 4개리를 더 흡수하고, 주외면의 잔여지역이 타 면으로 이속되어 사라지면서 공주군은 1읍 11면 체제가 되었다.

또한 이듬해에 기존의 욱정, 본정, 상반정, 대화정, 금정, 산성정 6정 체제에서 금학정, 금성정, 옥룡정, 웅진정 4개가 추가되어 총 10개정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공주읍의 초대읍장은 일본인 나카오카 덴키치(中岡傳吉)로, 충남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주금융조합의 중역으로서도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당시 공주군수는 초대읍장은 공주유지들과 협의하여 선출하겠다고 신문기사를 냈는데, 그만큼 유지들의 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주읍 승격 이후 15일 만에 공주유지들은 공주군청에 모여 읍장 선정과 관련된 회의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나카오카 덴키치를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곧장 덴키치에게 찾아가 교섭하고는 다음 날 아침 공주읍장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날치기 임명이 아닐 수 없으나, 그것 또한 그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한편 공주읍은 기초자치단체로서 당시 의회가 존재하였다. 광복 후 1952년 첫 지방선거가 실시된 이후 1956년 8월 8일 두 번째 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각 군·읍·면마다 제2대 지방의회가 구성 되었다. 그 결과 공주읍에서도 총 18명의 의원이 선발되었고, 그들은 4년간 활동하였다. 

▲ 소화 12년(1937년) 공주읍읍세일반 속 공주읍사무소 전경(서울대학교도서관 소장)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으로 옮긴 공주읍사무소

공주읍사무소는 공주문화원 앞에 자리한 지금의 공주역사영상관 건물이었다. 이곳은 25평의 2층 규모로 공주에서 보기 힘든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 중 하나이다. 본래 1924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으로 건축되었다.

1931년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된 뒤, 공주읍의 행정은 도립공주의원 앞에 있던 공주면사무소에서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다 충남금융조합연합회가 해체되자 공실로 있던 그 건물을 매수하여, 1934년 5월 5일 연합회관의 건물로 이전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공주읍에서는 여러 부속 사업들을 이끌어 갔다. 읍세일반의 기록에 따르면 1930년부터 공주청년훈련소를 설치하여 당시에 생도 약40명을 교육하였으며, 옥룡동에 환자 6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격리병사, 도살장, 그리고 웅진동 용당리에 화장터와 공동묘지를 운영하였다.

또, 이전 후 공채시험을 통해 면서기를 선발하였는데, 응시자는 20세~35세의 연령제한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라면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과목은 총 5과목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서과목으로 일본인이라면 우리말을 할 수 있어야 했고, 조선인이라면 일본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밖에 작문, 산술, 습자, 법제 과목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면접과 같은 구두시험이 있으나 중학교 졸업자는 면제되었다. 그해 35명 지원에 총 8명이 선발되었다.

공주읍사무소는 1987년 공주읍이 공주군으로 승격되고 나서 임시로 공주시청으로 사용되다가 1989년 공주시청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함에 따라 폐각되었다.

이후 민간에 매각되어 미술학원으로 이용되다가 다시 공주시에서 매입하고 공주의 근대건축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4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공주역사영상관으로 이름 붙여져 활용되고 있는데, 공주의 다양한 역사 문화와 더불어 공주사람들이 살아온 옛 이야기를 담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희망해 본다.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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