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4

공주4대명물에 버들 세공품이요

공주사람이라면 오늘날 공주의 특산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토실토실한 ‘알밤’. 전국 최고의 품질과 생산량을 자랑하며, 매년 성황리에 알밤축제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에도 공주의 특산품은 알밤이었을까?

일제강점기 소설 ‘청춘예찬’으로 유명한 민태원(閔泰瑗)은 작가로서 첫 발을 디디기 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는데, 전국을 돌며 각지의 인상기를 담은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는 1919년 11월 늦가을 공주에도 들러 9일부터 12일까지 「공주일별기(公州一瞥記)」를 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공주의 4대 명물이 있는데,  “첫째는 쌍수산성의 승경(勝景)이요, 둘째는 부호 김갑순이요, 셋째는 버들 세공품이요, 넷째는 감이다”라고 소개하였다. 공주의 명물이었다는 버들 세공품, 우리는 그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금강가에서의 기류경영작업 모습(공주학연구원 엽서 소장)

버드나무가 많았던 공주

공주는 그 옛날 고릿적부터 버드나무가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공주를 남북으로 가르며 금강으로 흘러가는 제민천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버드나무가 자라는 것은 이상할리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의 풍광과 함께 버드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 경치는 옛 선인들이 봐도 시가 술술 나올 만큼 제일의 풍경이었나 보다. 조선시대 공주를 다녀간 선비들의 옛 시를 살펴보면 공주의 풍광을 노래한 시에 버들가지가 자주 등장한다.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오례의』를 지었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충청도관찰사 재임기에 공주에 왔었다.

그는 소임을 마치고 금강루(錦江樓)에 올라 "금강의 봄물이 이끼보다 푸른데, 두 언덕 푸른 산은 그림을 펼쳤도다. 물가에 잔디풀 한가닥 푸르고, 길에 쌓인 버들개지 천 무더기 희구나. (생략)” 라는 시를 지어, 길가에 자란 버드나무가 무척 많고도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또, 조선전기 문장가로 유명한 서거정(徐居正)은 공주 주변의 명승지 10곳을 노래한 「공주십경시(公州十景詩)」 중 「공주연정」시에 “관아 다리 곁 버들가지 실실이 푸르고, 새 못의 연꽃은 비스듬히 기울며 피어 있네. 나그네는 긴긴 해에 일없이 마시고 있나니, 비로소 이곳이 강남풍경인 줄 알겠구나”라고 노래하였다. 공주목 관아를 잇는 다리, 즉 지금의 대통교 주변에도 버드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기류세공의 1번지

그렇다면 공주의 4대명물로서 버들세공품이 만들어 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생하는 기류(杞柳)를 소재로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의 생활풍토와 맞물려 그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다.

▲ 기류재배지 모습(사이토마코토기념관 엽서 소장)

공주에서는 바로 이 즈음부터 자생이 아닌 재배를 통한 버들세공품 생산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23년 5월 7일 「충남의 상공시설 6」편을 살펴보면, 1910년 공주에 사는 일본인이 기류재배를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직접경영을 통해 점차 유망해져 각 군에 보급하였는데, 주요산지는 공주, 연기 두 곳으로 그 면적이 약 6천 정보(町步), 수확량이 2만8천관이나 되었다.  제품은 일본에 비하면 손색이 없을 정도 뛰어나 연매출액이 1만5천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공주에서 기류세공품을 주로 생산해 낸 곳은 조선흥산주식회사(朝鮮興山株式會社) 기류공장이었다. 1924년 전국에서 기류세공품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 경기도 시흥, 대구, 평안남도 안주, 그리고 공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공주에서 주원료인 기류를 비롯해 가장 많은 세공품을 생산해 냈다.

당시 생산품으로는 버들고리(柳行李, やなぎごうり)와 바구니가 주를 이루었는데, 총 생산량이 18,705개로 전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관업원에서도 기류공인 양성

조선에서는 이 기류세공품들을 만드는 것이 전통적으로 천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동안 신분이 낮은 천민출신의 사람들이 만들어 왔다. 그러다 기류사업이 꽤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이었기에 일본인들에게는 깊은 관심의 대상 이었다.

그들은 기류재배와 함께 기류세공까지 함께 경영하였으며, 미곡상점 주인이 부업으로 기류를 재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기류재배와 세공은 공주에서 각광을 받는 사업이었다.

이러한 세공품 생산에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들은 주로 천인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교동 하고개 넘어 피맛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오랫동안 천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그들이 세공품 생산에 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죄수나 부랑자들도 세공품생산의 주요 노동자 중 하나였다. 공주에는 지금의 범죄예방 보호시설로서 1911년 창건된 관업원(慣業院)이 있었다. 관업원은 공주외감옥인 향옥 부근 제민천변에 세워졌는데, 경성보호회와 함께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보호회였다.

그곳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한 죄수나 떠돌이 부랑자들이 사회적으로 갱생하여 독립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때 보호장 안에서 장내취업자에게 기류공(杞柳工)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취업도 알선하여 그 성적 또한 매우 좋았다. 매일신보 기사에도 공주 버들고리 생산에 관업원 피보호자들의 기여도가 꽤 높았음을 말해준다.

▲ 공주관업원 기류공 피보호자의 작업모습(『조선형무소사진첩(1924년)』

제민천의 버드나무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

전성기를 보낸 공주의 버들세공품사업도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어 어느 순간 마감이 되어 버렸다. 그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지만, 일제의 기운이 다하고 광복을 맞을 즈음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공주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버드나무도 충남도청 소재지로서 모습을 갖추기 위해 제민천변 정비사업이 벌어지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민천에서 버드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류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면서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유교(柳橋)로 불려졌던 그 다리의 이름도 주변에 있던 한약방의 이름을 따 ‘제세당다리’로 공주사람들의 기억속에 더 익숙해 졌다. 이제는 간간히 공주 사람들의 옛 졸업사진을 통해서 그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을 뿐이다.

(작성자 :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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