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공주에 대한 수식어는 공주의 역사만큼이나 많은데 그 가운데 효의 본고장으로 불려지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충, 효. 열을 생활의 최고 덕목으로 여겨왔던 우리나라는 전국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이에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공주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바, 이러한 유적의 양적 기준에 의하여 효의 본 고장으로 불려진 것이 아니고, 공주를 효의 본고장으로 칭하는 것은 현전 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에 최초의 효자로 기록된 사람이 바로 우리고장의 효자 향덕(向德)이기 때문인 것이다. 향덕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의 인물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善)이고 자는 반길(潘吉)인데 천품이 온순하고 선량하여 향리에서 그의 품행을 높이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았다. 향덕도 효성있고 공순하기로 당시에 유명하였다.

천보 14년 을미(755년, 신라 경덕왕14년)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게다가 유행병까지 덮치었는데, 향덕의 부모가 주리고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또 등창이 나서 모두 죽기에 이르렀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지만 봉양을 할 거리가 없는지라 이에 자기의 볼기살을 베어 먹이었다.

또 어머니의 등 창을 입으로 빨아서 모두 무사하게 되었다. 그 고을 관리가 이 일을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지시를 내려 벼3백휘(1휘는 열말)와 집 한 채와 구분전 얼마를 주고 관리에게 명령하여 비를 세우고 시적을 기록하여 그를 기념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그 곳을 이름하여 효자의 마을[孝家里]라고 한다.

충·효·열은 전통시대의중요한 유교덕목이었으므로, 역사서를 편찬할 때에는 충·효·열 인물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충·효·열을 기록한 문헌으로는 먼저 역사서들을 들 수가 있으나, 이는 극히 제한적이고 정책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에 윤리서 라든가, 국가의 포장정책에 따라 예조에서 작성한 등록류 자료는 구체적이다.

그런가하면 포장의 과정을 보여주는 고문서 자료라든가 지역별로 삼강인물의 행적을 이어가려는 의지 때문에 지리지·읍지의 인물조의 기록도 매우 많다.

다음으로는 역사서의 충·효·열 기록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현전 사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와「삼국유사」이다. 1145년(인종23)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전체의 역사서로 이중 효와 관련되는 기록은 열전(列傳)에서 보인다. 효행인물로는 향덕(向德), 성각(聖覺), 효년 지은(知恩)등과 열녀로 신라 진평왕 때의 설씨녀(薛氏女), 백제 개로왕 때의 도미처(都彌妻)등이 기록되어 있다.

1281년(충렬왕 7)경에 편찬된「삼국유사」의 효선편(孝善篇)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효에 대한 기록이 독립된 편목으로 다루어진 효시이다.

효선편의 내용은 진정사의 효도와 선행[眞定師孝善雙美],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 [大城孝二世父母], 향득사지가 다리살을 베어 아버지를 공양하다[向得舍知割股供親-향득사지는 삼국사기의 향덕과 동일인이다.]손순이 아이를 묻다[孫順埋兒], 가난한 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貧女養母]등으로 향득의 경우를 제외하면 효사(孝事)를 불교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한 것들이다.

한편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에서는 공주의 충효열 인물을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이중 충남사람으로 윤구생이 있는데, 그는 금주(錦州,지금의 금산군)사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충·효·열을 대단히 중시하였지만,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이 충·효·열 인물과 그 행적을 거의 빠짐없이 수록하고 있는 반면, 중·후기에 이르면 포상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를 일일이 다 수록할 수가 없으므로, 특이한 사례나 대표적인 인물만 수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충신이나 효자보다 열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성리학의 시대적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공주목의 효행 인물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20년(세종2)의기사이다. 이후 순종실록까지의 공주의 충·효·열 관련 사실을 정리하여 보면 '공주의 충·효·열 유적' 참고하면 된다.

이 내용에서 나타난 것을 요약해보면 대략 두 가지가 될 것 같다. 하나는 효를 행하기가 이처럼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효를 행 한자에게는 나라에서도 상(賞)을 내리고 비(碑)를 세워 후세에까지 그 행적을 기리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포상을 하는 기준이나 종류는 어떻게 되는지를 충·효·열의 역사와 유적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공주목의 효행 인물들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충·효·열 포장(褒章)의 역사와 유적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한다.

동양사회에서 충·효·열은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변하기는 하였지만, 성리학의 발전과정과 함께 사회의 주요 이데올로기로서 그 의미를 부각시켰다. 한국사회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고, 특히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조선시기에는 전기간동안 충·효·열의 정신이 강조되었다.

물론 이들 충·효·열 삼강의 행적은 하나의 종합된 덕목이었으므로 가치면에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대배경에 다른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어느 시대에는 충이 더 강조되고, 어느 시대에는 효가 더 강조되는 등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또 충·효·열을 행한 인물에 대한 포장 정책 역시 시기별로 약간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정기, 부정기적으로 행적이 뛰어나고 향중의 공론이 형성된 경우 여러 절차를 거쳐서 포장(褒章)을 하고 이에 따른 특혜를 주었다.

충·효·열 행적이 인정된 자는 포장을 청하는 공론을 모아 대개 사람들이 연명으로 천장을 수령·관찰사·어사 등에게 올렸으며, 직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조에서는 현지조사를 하여 포장을 결정하였는데, 포장의 종류에는 정문(旌門), 상직(賞職), 복호(複戶), 상물(賞物)등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효행 행적에 대해 이루어진 포장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인 정려(旌閭)는 오늘날에도 곳곳에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니면서 많이 남아 있다. 또 정려 유적(정려·정문·정려비)이외에도 관련 고문서, 비석 및 기타 삼강의 행적과 관련된 유물·유적 등은 매우 많다.

정려는 목조건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퇴락하면 후손들에 의해 중·개수되거나 새로 건립된다. 따라서 현존 정려라 하더라도 건축물이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지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려가 건립된 배경, 건립과정, 정려의 건립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그 지역의 사족(士族)적 분위기 등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충·효·열 관련문헌으로는 사서(史書), 지리지(地理志)의 인물조, 윤리서(倫理書), 예조에서 작성한 등록류(謄錄類)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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