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안다고 자부해온 문인 가운데 <목근통신 木槿通信>의 수필가 김소운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07년에 태어나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거기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한국문학을 일본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런데 김소운은 언제부터인지 요즘의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포탈사이트 <야후>의 검색창에 김소운을 쳐넣었더니 전혀 뜻밖의 현상이 나타났다.

엉뚱하게도 김소운 대신 김소연이란 이름으로 전환한 검색결과가 화면에 뜨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요즘 잘 나가는 슈퍼모델 출신의 TV 탤런트라고 한다.

달갑지 않은 나이로 벌써 구세대가 되어버린 나는 김소연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의 인터넷 신세대는 김소운이 누구인지 모르며 알 필요조차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거기에서 드러난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김소운을 모르니, 그가 쓴 <목근통신>을 더욱 알 리가 없다. 작가 자신의 전언에 의하면, 그가 <목근통신>을 처음 쓴 것은 1950년대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삼성문화재단에서 삼성문화문고본으로 다시 펴낸 것이 1973년이었다.

그 책의 앞부분에 <일본의 악 惡>이라고 이름 붙여진 짤막한 글이 들어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우에노 上野나 히비야 日比谷 같은 일본의 공원지대에 가면 쇠고리를 엮어서 금줄을 두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쇠고리를 이은 기둥들이 대개 철주 鐵柱에다 시멘트를 입혀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시멘트만 입힌 것이 아니라 그걸 마치 나무기둥처럼 보이게 하려고 거기에 나무가지를 잘라낸 자국이나 나이테까지 교묘하게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세상의 <아취 雅趣>란 <돌에 서린 석의 石衣>와 같고 <쇠그릇에 앉은 녹>과 같은 것일진대,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거기다 실용성까지 겸비시킨 것이 일본의 국민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일상생활에서 보는 그런 <사소한 거짓들> 속에 <일본을 그르칠 중대한 화인 禍因>이 숨어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놀랍고 기가 막힌 것은, 당시 김소운이 그처럼 비판해마지 않던 <일본의 악>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버젓이 들어와 우리의 것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오늘 일부러 그 증거를 잡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가, 마치 통나무를 깎아놓은 것 같은 등나무 벤치용 탁자 하나가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파손되어 시멘트 속살 부분이 흉물스럽게 드러난 모습을 발견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나는 그것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대중문화가 총체적으로 빠져버린 탈역사적 형식주의의 맹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상 대대로 증오해마지 않던 원수를 닮아버린 건, 지금의 우리가 부지중에 잃어버린 냉엄한 역사의식의 거울 때문이다. 바로 어제의 과거를 잊고 사는 우리가 무슨 재주로 반세기 이전에 씨 뿌려진 일본의 식민통치 문화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잊는 것은 다름 아닌 생각을 잃는 것이다. 뿌리 없는 가화 假花가 만발한 사회, 그 속에서 우리의 젊은 세대는 오로지 <카르페 디엠>의 현재적 즉물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외모 지상주의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너 나 없이 얼짱 몸짱 신드롬에 열광하는 <골 빈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우리 민족을 향해 힘주어 갈파했던 이는, 역시 오래 전에 작고한, 종교인 함석헌이다. <우리에겐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 그래서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라>고 통박하던 그의 절절한 나라사랑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렇다. <일본을 그르칠 중대한 화인>을 멋도 모르고 가져다 암세포처럼 키워온 우리에게 올바른 재생의 방도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투철한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렸던 생각을 하루빨리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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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진상
공주사대 독어교육과 졸,
고려대 대학원 졸, 문학박사
현재 공주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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